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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성녀 헤드비히 수도자 /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 동정 /성 제라드 마젤라

Berardus 2021. 10. 15. 17:50

 

 

 10월 16일

성녀 헤드비히


ST. Hedwiga(Jadwiga)

Sant’ Edvige Religiosa e Duchessa di Slesia e di Polonia

1174 in Bavaria - October 1243 at Trebnitz

Canonized: 1266 by Pope Clement IV

 

 

성녀 헤드비히(헤드비제스)는 바바리아 안덱스의 백작 베르톨드 3세의 딸이다.

그녀는 프란코니아의 키친켄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2세 때에 실레시아(슐레지엔)의 공작 헨리코(헨리)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매우 열심하고 또 용기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아내의 신앙생활과 자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트렙니츠(트레브니즈)에 시토 수녀원을 세웠다.

그들 사이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다.

1238년에 남편을 사별한 헤드비가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하여 큰 덕을 쌓았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물질적, 영신적 이익을 위하여 늘 헌신하였으나,

자기 자신은 극도의 가난 속에서 하느님만을 섬겼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권력과 부를 현명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대단히 드물다.

그런데 이 적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헤드비제스이다.

12세기가 끝나 갈 무렵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헤드비제스는

 어린 나이에 슐레지엔의 공작 헨리와 결혼했다.

 

그녀의 설득과 개인적인 노력으로 술레지엔에는 많은 남녀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몇 개의 병원들도 세워졌는데 그 중 하나는 나환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권력 투쟁이 난무하던 그 당시에 주위 나라들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의 가장 큰 슬픔은 자기의 두 아들이 나누어 받은 영지에 불만을 품고

서로 무력 투쟁을 벌이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남편인 헨리가 두 아들에게 나누어 준 영지에 한 아들이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서로가 절제할 것을 서원한 다음

대부분의 시간을 트레브니즈의 수도원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수녀원의 정식회원은 아니었지만, 공동 생활에 참여했다.

1243년에 세상을 떠난 그녀는 트레브니즈에 묻혔다. 1267년에 시성되었다.

 

우리가 어떠한 재물을 소유하도록 축복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필요나 개인적인 안락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용도에 그 재물이 쓰이든지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발전을 가져와야 하며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상의 사물 자체는 결코 하느님의 사랑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재물에 집착하여 그 축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잊어 버릴 만큼 감각적인 것에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헤드비제스는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상의 재물을 사용하기 위하여

나중에 수녀가 되고자 했던 자신의 소망까지 희생했다.

그녀는 자신의 재물로 충분히 안락하게 살수 있었으나

스스로 가난을 택하여 겨울 신발과 같은 아주 기본적인 필수품까지도 사양했다.

 

그녀는 수도복을 입고 수녀처럼 생활을 했지만 자기 재산의 관리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았고, 재물을 아낌없이 사용함으로써

 그녀 자신과 그녀가 도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 은총에 의한 초자연적 생활을 더욱 잘 깨닫게 해주었다.


 

일곱자녀의 어머니이며 슬레시아의 공작부인인 헤드비히는 과부로서의 생활속에서

그리고 하루하루를 경건히 지내는 생활습관 속에서 신성을 경험하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녀가 트레비츠(폴란드)지방에 세운,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그녀의 모범적인 삶은 우리에게 생활의 어떠한 환경들도

우리를 보다 위대한 신성으로 인도하는 훌륭한 길잡이이며 하느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이렇듯 크리스찬적 사랑으로 일곱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하신 성스러운 어머니의 예는

우리에게 우리 공동체가 간과하기 쉬운 가족단위의 신앙교육의 중요성과

그 문제점을 지적해 줍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동 시대의 저자가 쓴 「성녀 헤드비제스의 생애」에서

(Acta Sanctorum Octobris 8 (1853), 201-202)

 

그녀는 언제나 하느님께로 향했다.

 

이 하느님의 여종은 천상 예루살렘의 건설에 놓는 살아 있는 돌들은

이 세상의 박해로 인해 정제되어야 하고 또 천상평화의 영원한 즐거움을 얻으려면

수많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통의 홍수에다 자신을 활짝 펼쳐 열고

여러 종류의 극기의 채찍으로 사정없이 자기 몸을 벌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단식과 절제행위로 자신을 혹심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많은 이들은

그렇게 연약한 여인이 어떻게 그런 고통들을 견디어 낼 수 있는지 놀라 마지않았다.

 

계속적인 고통으로 자기 육신을 괴롭히고 (그러나 언제나 분별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밤샘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영신은 더욱더 견고히 되고 은총에서 한층 더 진보했으며

신심과 천상 사랑의 불이 그녀 안에 점점 더 확대되어 불타 올랐다.

매우 열렬한 갈망으로 드높여지고 하느님 안에로 흡수되어 버려 자기의 몸 감각을 잃어버렀고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뜨거운 열성으로 하느님께로 늘 향했을 뿐만 아니라 선업의 열매를 가져다 주는 자비로써

이웃을 돌보는 데 몸바쳐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너그러이 애긍 시사하였다.

 

남녀 수도 공동체들에게-그들이 수도원 안에서 살건 세상에서 활동 생활을 하든 간에

-그리고, 과부와 고아들에게,

허약자와 병자들에게,나병 환자와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순례자들과 어린아이를 키우는 가난한 여인들에게 도움을 베풀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누가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가 그냥 돌아서게 하는 일을 절대로 허용치 않았다.

 

이 하느님의 여종은 할 수 있는 한 선행을 등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다음의 한 가지 은총을 주셨다.

선행을 할 인간 지력이 떨어져 자기 역량으로는 그일을 못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수난의 영능으로써 이웃이 자기에게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육신적 또는 영신적인 고통을 덜고자 자기에게 찾아온 이들을 모두

하느님의 은혜로써 도와줄 수 있었다.




 

[이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중앙러시아.18세기.32.5 x 27cm

 

이 성화(Icon)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성화의 화면은 표면에서 약간 뒤로 들어갔으며 그 가장자리 윗부분은 반원형을 이룬다.

십자가는 목판의 한 중앙에 위치한다.

십자가의 긴 횡목 위에는 두 명의 비천하는 천사들이 슬퍼하고 있는데 그들의 손은 수건으로 덮여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아랫 횡목(橫木) 위에 서있고,

그 밖에 십자가의 수직목(垂直木) 양옆에는 창과 식초를 적신 막대기가 꽂혀 있다.

 

십자가 아래에는 골고다의 동굴이 열려 있으며 아담의 해골이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구원해야 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고 전한다.

십자가의 왼쪽에는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 안나가 서있다.

오른쪽에는 그리스도의 애제자였던 성 요한과 개종한 장교 롱기니오스가 서있다.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낡은 성벽 앞에서 전개되었다.

 

-유럽 聖畵(ICON)集 에서-

 

 

 

10월 16일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 동정


St.Margaret Mary Alacoque

St.Margarita Alacoque, V

22 July 1647 at L’Hautecourt, Burgundy, France

- 17 October 1690; body incorrupt

Canonized:1920 by Pope Benedict XV

Margherita = perla, dal greco e latino

 

 

1647년 프랑스의 오탱 교구에서 태어났다

1671년, 파라이-러-모니알의 방문 수도원에 들어갔고, 그 이듬 해에 서약하였다.

’진주’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마르가리타는 수녀원 입회후 완덕의 길에서 놀랍게 진보하였으며,

특히 예수 성심께 대한 신비적 계시를 받아 교회 내에서 성심께 대한 신심을 전파하는 데 공헌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경배하는 예수 성심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반대와 시련에 부딪혔지만, 후에 시복된 그녀의 고백신부 끌로드 라 콩롱비에르에 의해

예수성심 공경의 진실성을 인정 받게 되었고 이 신심을 교회안에 널리 전파한 후 1690년 선종했다.

 

*성 끌로드 라 콜롱비에르 축일: 2월15일.게시판1619번.
Canonized :31 May 1992 by Pope John Paul II in Rome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마르가리타 마리아 수녀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4번이나 경험하였다. 이러한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당신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알렸고,

9번의 금요일과 성 시간으로 알려지게 된 신심을 그녀에게 교육시켰으며,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구하였다.

 

마르가리타는 성체를 사랑하며 영성체를 자주하고 특히 매월 첫 금요일 을 꼭 지킴으로써

세상의 배은 망덕과 냉담을 보상해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고통과 고독을 기억하며 매주 목요일 밤에는

 한 시간 동안 성시간 기도를 바쳤다.

예수께서는 또한 속죄의 날을 정하도록 명하시기도 했다.

 

잔세니즘,엄격주의에 대항하여 마르가리타는

강생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찬 진정한 복음적 신앙과

그리고 성사에 의한 삶으로 겸손되이 증거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행위는 전 교회를 위한 성령의 섭리이었습니다.

 


마르가리타 마리아는,

교회는 바로 예수 성심이 상징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내세우신 선택받은 사람이다.

또한"나의 십자가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어머니의 십자가 고통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질병과 고통스런 가정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의 십자가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어머니의 십자가 고통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동안 그녀는 결혼을 생각했으나 24세에 방문 수녀회에 들어갔다.

 

그녀는 모범적인 수녀였으나, "평범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출한 것이 아무것도"없었다.

 그러나 이 젊은 수녀는 이와 같은 익명성을 누리지 않았다.

동료수녀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한 수녀)는 그녀가 겸손하고 단순하며 솔직했지만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비판이나 꾸중에도 친절하고 인내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단순한 기도’를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기대하는 것처럼 묵상을 할수가 없었다.

조용하고 느리며 솜씨가 서투른 그녀는 활발한

양노원 수녀를 도와 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수녀가 된 지 3년 되던 해인 1674년 12월 27일, 그녀는 첫번째 계시를 받았다.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에 싸인 것 같은 환상에 속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녀는

그러한 하느님의 현존에 ’싸여 있다’고 느꼈다.

그리스도의 요구는 인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마르가리타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엇다.

 

그 후 13개월 동안 예수께서는 마르가리타에게 때때로 나타나셨다.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을 향한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마르가리타는 성체를 사랑하며 영성체를 자주하고

특히 매월 첫 금요일을 꼭 지킴으로써 세상의 배은 망덕과 냉담을 보상해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고통과 고독을 기억하며

매주 목요일 밤에는 한 시간 동안 성시간 기도를 바쳤다.

예수께서는 또한 속죄의 날을 정하도록 명하시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환시 중에 받은 교육을 따르려는 노력 중에 장상으로부터

수많은 퇴짜를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온갖 장애를 극복하였으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발현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모든 성인들처럼 마르가리타도 그녀의 성덕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녀의 친형제 중에는 그녀를 미워한 사람도 있었다.

그녀에 대해 조사를 한 신학자들은 그녀가 본 발현은 환상이라고 선언했으며,

그녀가 좀더 배불리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는 그녀가 가르친 어린이들의 부모들까지 그녀를 사기꾼이며 이단적인 선동자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신의 수녀회원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수도원의 고해신부였던 복자 끌로드 라 콩롱비에르 신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콩롱비에르 신부는 예수회원이었는데, 그는 마르가리따의 환시는 올바르다고 선언하였다.

1638년, 마더 멜랭이 장상으로 선출되었을 때 수도원 내의 반대도 종식되었으며,

 후일 그녀는 수련장이 되었다.

 

1686년 초에는 수도원에서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성심께 봉헌된 성당이 파라이-러-모니알에 세워졌고,

곧이어 성심 축일을 지내는 관습이 방문 수녀회의 다른 수도원으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마르가리따 마리아는 1690년 10월 17일에 파라이-러-모니알에서 선종하여,

1920년에 시성되었다.

 

 

"나는 하느님밖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으며 예수님의 마음 속에 나 자신을 숨기고자 합니다."

마르가리따와 성 요한 에우데스 그리고 복자 끌로드 라 콩롱비에르는 "성심의 성인들"로 불린다.

성심에 대한 신심을 1765년, 교황 끌레멘스 13세에 의하여 선포되었으니,

그녀의 사후 75년 만의 거사였다.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우리 시대는 사적 계시를 ’입증’할 수가 없다.

신학자들은 그것이 공개되었더라도 ’믿어야’할 필요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가리타 마리아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주장한 메시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녀의 보속과 기도에 대한 강조,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 대한 상기는

 예수 성심 공경의 그리스도교적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한,

예수 성심 공경이 미신에 빠지거나 피상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 주는 데 충분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번째 발현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마음이 지치고 녹아내릴 정도로

인간을 사랑한 성심을 보라.

그런데 나는 대부분 이 사랑의 성사에서 그들로부터 배은 망덕과 냉담과 경멸을 받을 뿐이다.…

나는 성체 성사에서 나를 부끄럽게 하는

미지근하고 나태한 마음이 나에게 끼친 손상을 너의 열성으로 보상하도록

 내가 너에게 준 마음으로 되돌아왔다."

 

 

성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꼭 동정의 편지에서

(Vie et CEuvres 2, Paris 1915,321.336. 493,554)

 

우리는 온갖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께서 당신의 성심이 특별한 공경을 받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시는 이유는

우리 영혼에서 당신이 얻어 주신 속량의 효과를 새롭게 하시는 데 있다고 봅니다.

성심은 겸손한 이들의 마음을 채우려고만 하시는 고갈됨이 없으신 샘으로서

 영혼들이 기꺼이 당신의 선의에 따라 살도록 준비시켜 주십니다.

 

 

이 성심에서 세 가닥의 물줄기가 중단 없이 흘러 나옵니다.

첫 번째의 물줄기는 죄인들에 대한 자비의 물줄기로서 그들에게 회개와 참회의 영을 흘려 내보내십니다.

두번째의 물줄기는 온갖 고통을 받는 이와 특히 완덕을 지향하는 이들을 위로해 주는

 사랑의 물줄기로서 그들에게 어려움을 이겨낼 도움을 주십니다.

세 번째 물줄기는 주님이 당신과 합일되기를 원하시는 가장 완전한 벗들을 위한 사랑과 빛의 줄기로서

그들에게 당신의 지혜와 욕망을 전달하시어 각자의 고유한 실정에 따라

당신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데 그들이 완전히 헌신하게 하십니다.

 

이 성심은 온갖 선을 담고 있는 심연이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거기에 던져 넣어야 합니다.

이 성심은 우리의 모든 슬픔들을 잠기게 할 수 있는 기쁨의 심연이시고

 우리의 공허를 채워 주는 겸손의 심연이십니다.

불행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한 자비의 심연이시고

우리의 온갖 가난을 잠기게 할 수 있는 사랑의 심연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성심과 연합되어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회개로써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지만 결국에는 거기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기 위함입니다.

기도에서 아무 진전이 없음을 봅니까? 그때에는 제단의 성사에서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해 바치신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미지근한 신앙을 기워 갚기 위해 그분의 열성을 바치고 무슨 일을 하는 동안에건

 다음의 기도를 바치십시오.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는 당신 아드님의 성심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뜻에 따라

 이 일을 하거나 또는 이 고통을 견디어 냅니다.

내 모든 일 가운데 존재하는 불완전함과 악을 기워 갚기 위해 바칩니다.”

그리고 생활의 각 상황에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활에서 고통스럽고 듣기 거북하며 모욕적인 일이 생길 때마다 여러분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이 너를 그분과 합일시키기 위해 보내시는 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나 모든 보화보다 더 고귀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십시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성심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주님은 당신의 영광에 보탬이 되는 것을 우리를 위해 해주시고

 우리는 신뢰심을 다 바쳐 주님의 뜻에 기꺼이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각기 하느님께 받은 사명이 있다.

툭히 성인들의 사명은 더욱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신분이 귀하다고 더 큰 사명이 부여되거나, 또는 천하다고 더 작은 사명이 맡겨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1고린 1, 27)하신 성 바오로의 말씀 같이

 세속에서 어리석게 보이는 이가 대 사명을 띠고 혁혁한 공적을 남긴 일이 적지 않다.

 

예컨대, 예수 성심 공경의 제창자로 최근에 성녀가 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도

 지금은 가톨릭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이 유명하지만,

그 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개 수도자에 불과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중대한 사명을 맡기셨다.

 

마르가리타는 1647년, 프랑스의 불고뉴 주 로트쿠르 성에 사는 알라코크가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는 그녀의 출생 후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네명의 자녀를 거느린 어머니는 가세가 기울고 생활이 곤란해지자 마르가리타를 샤를르에 있는

성 클라라 수녀원에 맡겨 교육을 받게 했다.

마르가리타는 수녀원에서 2년간을 행복하게 지냈는데,

하느님의 뜻이었는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신병에 걸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4년간을 침상에 누워지냈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본인은 물론 부모 형제들 까지

치유의 유일한 희망은 병자의 나음이신 성모 마리아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만약 마르가리타가 완쾌되면 꼭 수도자로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서원 하에 열렬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난치병이 순식간에 완쾌되었는데, 속담에 "목구명만 넘기면

 뜨거운 줄 모른다"는 식으로 병을 고친 마르가리타는

다시금 세속의 쾌락에 마음이 끌려 그녀가 했던 서원을 이행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큰 죄악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기도하기를 즐겼으며, 어떤 때에는 성체 앞에 꿇어 오랜 시간 동안 관상했다.

 

그동안 집안 살림은 더욱 궁색해졌다. 그래서 마르가리타는 가끔 이웃집에서 식량을 얻어서

 조금이라도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드리도록 햇다.

외출복이 한 벌 밖에 없어 남의 옷을 빌려 입고 주일 미사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혼기가 가까워지자 마르가리타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그 중에는 집안의 곤궁을 넉넉히 메워 줄만한 재산가도 있었으므로,

어머니며 형제들은 "예전에 발한 서원은 무효다"라든가

또는 "그러한 서원을 풀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하며 결혼하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주님을 두려워한 마르가리타는 그 서원을 깨뜨릴 만한 용기가 없어

마침내 모든 혼담을 물리치고 1671년 5월 25일, 24세의 나이로 방문수녀최에 들어갔다.

수녀가 된 마르가리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배필로 정하고 주님께 대한 것만을 생각하며

 하나에서 끝까지 그의 마음에 들도록 온 힘을 다했다.

 

  

그랬기에 주님께서도 그녀를 직접 인도해 주시며,

더욱이 당신의 성심 공경을 마르가리타를 통해 전파시키고자,

어느 날 기도에 몰두하고 있던 그녀에게 나타나시어,

위에는 십자가가 있고 주위에 가시관이 둘러있는, 사랑의 불에 타는 당신의 심장을 내 보이시며

"보라!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는 이 마음을!

나는 여기에 대해 감사를 받아야 될 것이거늘 그 보답으로 받는 것은

오직 예수 성심 축일을 정할 것과 매달 첫 금요일에 고해, 영성체 할 것,

매 목요일에 성시간을 지킬 것과, 가정을 예수 성심께 봉헌할 것을 가르쳐 주셨으며

그 후에도 가끔 발현하시어 여러 가지를 계시해 주셨다.

 

마르가리타는 주님의 발현과 계시 일체를 장상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쉽사리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의 조사로 시련이 시작되어 고통을 받게 되었다.

 맨 처음 그녀의 말을 믿은 사람은 그녀의 고해 신부인 클라우디오 드 라 콜롬비에르였다.

 

그녀는 수련장이 되어 수련 수녀들에게 주님의 성심을 열애할 것과

 올바른 신심을 갖도록 가르쳐 주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그 당시는 매우 새로운 것이었으므로

교회 당국의 여러 가지 심사를 받아야 했는데, 1688년 7월 2에서야 지당한 신심 행사임이 인정되어,

그 수녀원의 주보인 성모마리아 축일에 비로소 그 수녀원에서 예수께서 원하시던

 성심 공경 신심 행사가 이루어졌을 때, 그녀의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르가리타는 자기의 사명이 성취되었음에 너무 안도감을 느껴서인지,

혹은 긴장된 마음이 풀려서인지 얼마 후 병에 걸려

 1690년 10월 17일에 43세를 일기로 그 공로의 보수를 받기위해 천국으로 향했다.

그녀의 사후 그녀가 제안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순식간에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1920년 5월 13일에는 교황 베테딕토 15세에 의해 시성식이 거행되었으며,

그녀의 분묘가 있는 파레 르 모리아르 성당에는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인다.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2003년6월27일.게시판1245번

2004년6월18일.게시판1824번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로,

성체성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에 지낸다.

 

이 축일은 중세에 이르러 일반화되기 시작했으며,

1856년 교황 비오 9세는 예수 성심을 공경할 것을 권장하면서

 예수 성심 축일을 라틴 교회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1995년 한국 천구교 주교회의는 사제들이

 복음 선포의 직무를 되새기고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였다.

우리는 사제들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10월 16일

성 제라드 마젤라


ST. GERARD MAJELLA

San Gerardo Maiella Religioso

Muro Lucano (PZ), 1726

- Conv. di Materdomini presso Caposele (AV), 16 ottobre 1755

Canonized: 11 December 1904 by Pope Saint Pius X

 

 

남 이탈리아의 무로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이 사망하자 양복공의 도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하느님을 더욱 열심히 섬기려는 열정으로 가푸친에 입회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거절당한 후,

라체돈가 주교관의 일꾼이 되었다.

1745년, 그 주교가 서거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양복점을 열었다.

그 후 그는 1748년에야 뜻을 이루게 되었는데 구속주회의 평수사로 허가받은 것이다.

다행히 그는 1752년에 창설자이신 성 알폰소 리구오리에 의하여 서약을 발하였다.

수도원에서도 그는 양복 일을 하면서 병자들을 돌보았는데,

특히 몇 가지 초자연적 은혜가 크게 돋보였으니,

예를 들면,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나는 일(Bilocation), 예언, 탈혼,

환시 그리고 천상적인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성인은 아주 연약한 체구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으며.

성인은 자신 스스로 많은 고행과 보속을 했다.

그 이유는 졸포수사라는 이름이 붙은 마귀가 끊임없이 유혹했기 때문이다.

이 성인은 많은 기적을 행했으며 특히 보는 자리에서 몸이 사라지는 일,

그리고 동시에 두 곳에 발현하는 기적을 행했다.

 

그는 수녀들의 몇몇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도 활약하였고,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그의 성덕과 애덕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1754년, 그는 네리아 카찌아노라는 어느 여성으로부터 호색한으로 고발되었으나,

후일 그녀는 모든게 거짓이었음을 고백하였다.

그 후 나폴리로 파견되었으나 그를 만나려는 방문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므로,

몇 달 후에 카포셀레로 가서 그곳의 문지기로 봉사하면서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1904년에 시성되었고, 아기 출산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으신다.

 

 

어머니들의 성인 제라드 마젤라

 

구속주회홈에서 www.cssrkr.com

Thomas E, Tobin, C.Ss.R.  

 

왜 많은 사람들은 성 제라드 마제라를 "어머니들의 성인"으로 부르고, 그에게 기도 하는 것일까?

남자였고, 평수사였던 그에게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제라드는 남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몇마일 떨어지지 않은 무로라는 작은 시골에서

1726년 4월 6일에 아버지 베네딕타 고렐라 마젤라와 어머니 도미니크의 다섯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매우 약했기 때문에 급히 주교좌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어렸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그가 다섯 살이었을 때,

그는 벌써 집에서 가까이 있는 작은 성당에 기도하는데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성당에 다녀서 집에 올 때 그는 빵조각을 들고 오곤 했다.

가족들이 이에 대해서 물으면 그는 "아주 아름다운 소년"이 그 빵을 주었다고 대답했다.

 

한번은 그의 누이인 엘리자베스가 성당에가는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가 아기 예수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성상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그녀는 이상한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기 예수님이 성모 마리아의 팔에서 내려와

 제랄드와 함께 노는 것이 아닌가.

그뒤에 그 아기 예수님은 제라드에게 빵 조각을 주고 다시 그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것은 미카엘 대천사가 그의 첫영성체 때에 성체를 준 기적의 서곡을 알릴 뿐이었다.

 

 

일꾼

제라드가 12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는 학교를 떠나 일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재봉사의 견습생이 되게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는 것이었다.

그의 고용주는 이상하게도 그를 싫어해서 자주 그를 때리거나 욕을 했다.

제라드는 이런한 박해들이 그의 영적인 것을 위하여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한번은 그가 고용주에게 맞는 동안 웃는 얼굴을 보인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고용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때리는 동안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손이 나를 때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재봉사로서의 그의 견습생활이 끝난 후에, 제라드는 가끔씩 무로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와 있

는 라케도니아 주교의 집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점에서는 매우 성급한 기질이 있는 이 주교를 침묵으로 잘 견디어내어

 그의 인내의 덕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그의 기적들 중 하나가 일어났다.

어느날 그는 잘못하여 집의 열쇠를 우물에 빠뜨리게 되었다.

거룩하지만 단순하게도 그는 조그만 아기 예수님의 성상을 우물속으로 넣었다.

제라드가 그 성상을 끌어올렸을 때, 잃어버렸던 그 열쇠는 그 성상의 손에 걸려있었다.

 구경꾼들은 그것을 보고 놀랐다.

 

 

수도 성소

젊을 때 그는 당연히 수도적 삶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약한 건강 때문에 세 번씩이나 한 수도회에 입회하는 것을 거절 당했다.

그는 계속해서 평수사가 되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무로에서 선교를 위해 특별한 활동을 하고 있는 구속주회 사제는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는 구속주회에 지원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물었지만

그가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을 해낼 수 있을만한 건강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하지만 그는 끈질겼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원장이었던 바오로 가파로 신부는

 그의 어머니에게 그가 그들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그들이 떠나는 밤에 그를 방에 가두어두라고 부탁했다. 제라드의 어머니는 그의 부탁에 따랐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잠겼던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시트가 묶여있는 창문과 비어있는 침대를 발견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서 "나는 성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라는 메모를 발견했다.

 

제라드는 그들이 그 마을을 떠나려는 할 때 그들을 붙잡았다.

수많은 간청과 거절 후에 가파로 신부는 결국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를 일리체도에 있는 구속주회의 책임자에게

 "쓸모없는 평수사 한명을 당신에게 보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보냈다.

 

이 "쓸모없는" 평수사는 그와 함께 일했던 이에 진술에 따르면 네명의 사람들을 위해서 일했다.

구속주회원으로서 짧은 6년의 기간동안 제라드는 급격히 성덕으로 나아갔다.

그의 기도 생활은 끊임없었고, 그의 순명의 정신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여러번 그는 부재중인 그의 원장의 무언의 요청에 응답하여 먼 거리의 장소에 나타났다.

구속주회 형제들조차도 그를 성인으로서 존경하게 되었다.

 

수사로서의 많은 생활을 그는 선교사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여행으로 보냈다.

그들은 그를 매우 가치있는 형제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고해성사에 많은 죄인들을 성공적으로 데려왔고,

그들의 지난 나쁜 과거를 고백하도록 권유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든 사람들은 그를 따랐고 항상 그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크나큰 시련

진정한 신성(성인)은 항상 십자가의 시험을 받는다. 1754년 제라드는 크나큰 시련을 받았다.

그 하나는 어머니들과 그의 아이들을 위해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열심한 그의 일들중의 하나는 수녀원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소녀들을 돕고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가끔씩 그는 다른 방법으로는 수녀회에 들어갈 수 없는 가난한 소녀들의 지참금을 마련해 주었다.

 

네리아 카지아노(Neria Caggiano)는 제라드로부터 도움을 받은 소녀들 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자기가 싫어하는 수녀회에 들어갔고, 3주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행동을 설명하자면, 네리아는 수녀회의 삶에 대해 거짓말을 퍼트렸다.

그리고 제라드가 추천하는 수녀원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들을 무로의 착한 사람들이 믿기를 거부했을 때,

제라드의 이름을 실추시킴으로서 그녀 자신의 평판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제라드의 장상이었던 성 알폰소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녀는 제라드가 그가 선교활동을 하며 종종 머물렀던 집의 가족 중에

 어린 딸과 불순한 죄를 지었다고 고발했다.

 

 

제라드의 품행(행동)

제라드는 이러한 고발해 답하도록 성 알폰소에 의해 불려졌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방어하기보다는 그의 거룩한 주님의 모범을 따라 침묵을 지켰다.

사실 그의 침묵에 대해 성 알폰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젊은 수도자들에게 가혹한 고행을 부여했다.

제라드는 모든 외부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고, 성체를 모시는 특권을 거부했다.

 

영혼의 이익을 위한 그의 노력(변명)을 포기하는 것은 제라드에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서 성체를 모실수 없도록 하는 것에 비하면 작은 고행이었다.

그는 제단에서 사제의 손에 의해 축성된 성체를 빼앗고 싶기까지 한

격정적인 충동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달라고 요청을 하고 싶을 만큼 강렬함을 느꼈다.

 

얼마후 네리아는 중병에 걸렸고,

그녀는 성 알폰소에게 자신의 행동은 제라드를 반대하기 위한 완전한 거짓이며 중상이었다는

 고백의 편지를 썼다.

성 알폰소는 자신의 아들(수도회의 회원)의 순결의 소식을 듣고 기쁨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그러한 시련에도 우울해 하지 않았던 제라드는 마찬가지로 자신의 명예가 회복됨에도

 크게 우쭐되지 않았다.

이러한 두 개의 사건 안에서 그는 하느님의 뜻이 충만해짐을 느꼈고,

그를 채워주시는 것을 느꼈다.

 

 

기적의 일꾼

몇몇 성인들은 성 제라드의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기록했다.

그의 시복과 시성과정에서 그의 기적들이 광범위하고 풍부했던 것이 드러났다.

그는 종종 하느님이나 그분의 거룩한 뜻을 묵상하는 중에 탈혼 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의 몸은 땅에서 몇 피트 정도 떠올랐다.

또한 그는 같은 시간에 두 장소에서 나타나서 이야기하는

 특별한 기적을 행하였다는 믿을만한 기록도 있다.

 

그의 기적들 중의 대부분은 다른 이들을 위해 행했다.

이와같은 특별한 일들은 어떤 이가 그의 삶을 독서할 때 공공장소에서도 행하여졌다.

그는 높은 절벽에서 떨어진 한 소년의 삶을 돌려주었다.

그는 가난한 가족에게 부족한 밀가루를 축복하여 내년 추수 때까지 먹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여러번 그는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분배해준 빵을 증가시켰다.

하루는 그는 폭풍우의 파도로 인해

 거의 죽게된 어선의 뱃길을 기슭으로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 물을 걸어갔다.

여러번 제라드는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이들의 영혼의 감추어진 죄들을 이야기했고,

그들을 참회와 용서로 이끌었다.

 

어머니들을 위한 그의 기적적인 사도직 또한 그의 생애에 시작되었다.

한번은 제라드가 피로팔로라는 친구의 집에 자신의 손수건을 두고서 잊고 떠날 때

 그 가족의 딸들중의 한명이 그를 불렀다.

그 순간 제라드는 예언자적인 영감으로 "보관하세요. 언젠가 당신에게

이것이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손수건은 제라드의 귀중한 기념품으로 간직되었다.

몇 년 후에 제라드가 손수건을 준 그 소녀는 출산중에 죽음을 겪게 되었다.

그녀는 제라드의 말을 기억하고 손수건을 몸에 대었다.

거의 순식간에 위험은 지나가고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태중의 아기가 위험했던 어떤 한 어머니는 제라드의 기도를 바쳤다.

그녀와 그녀의 아기는 그 위험에서 안전히 빠져나왔다.

 

 

그의 죽음

항상 건강이 허약했던 제라드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1755년에 그는 급성 뇌출혈과 이질에 걸렸고, 그의 죽음이 급박했다.

그가 순명의 힘에 대해 위대한 가르침을 가르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의 장상은 그에게 만일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병에서 나으라고 명령하였다.

갑자기 그의 병은 사라진 듯 보였고, 침대에서 일어나 공동체에 다시 합류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고 단 몇 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 후에 제라드는 다시 그의 침대로 돌아왔고 그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완전하게 하느님의 뜻에서 소외되었고, 그의 방문에는 이러한 표시가 있었다.

"하느님의 뜻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으로서 머지않아 그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끔 그는 "나의 하느님, 저는 지극히 거룩한 당신의 뜻에 따라 죽기를 원합니다"하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1755년 10월 15일 자정이 되기 조금 전에 그의 순결한 영혼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영광(시성식)

제라드가 죽었을 때,

성당지기 수사는 흥분하여 그의 죽음을 알리는 대신에 축일때처럼 종을 울렸다.

수천명의 신자들이 "그들의 성인"의 시신을 보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나중에 종종 그들을 도왔던 그의 마지막 기념품을 찾으려 하였다.

그의 죽음 후에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는 제라드의 간구 덕분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시작했다.

1893년 교황 레오8세는 그를 시복하였다. 그리고 1904년 12월 11일 교황 바오로 10세에 의해

그는 성인품에 올랐다.

 

 

오늘날의 놀라운 일꾼

제라드에 대한 신심은 이탈리아를 넘어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그는 종종 죄인들이 진실하게 고해성사를 하도록 도왔기 때문에

 "오늘날의 놀라운 일꾼"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진실한 고해성사의 수호성인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어떤 이들은 어린 재봉사의 견습생으로 그를 존경했고,

구속주회 평수사로, 일꾼들의 수호성인으로 존경했다.

또한 제라드는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너무 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었고,

아주 많은 소녀들이 수녀회에 들어가도록 도왔기에

종종 성소의 성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머니들의 성인

이러한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이탈리아의 어머니들은 그들의 마음속 깊이 제라드를 간직하고 그들의 성인으로 모신다.

그의 시복 절차가 진행될 때 한 증인이 그는 출산의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고 증언하였다.

이렇게 보호하는 그의 명성은 퍼져나가서

세계의 많은 나라의 어머니들은

성 제라드의 메달을 가지지 않고서는 출산하러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신심은 북아메리카의 미국과 카나다 모두에서 매우 유명하게 되었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그의 힘을 체험했다.

 

많은 병원들은 그들의 산부인과를 제라드에게 봉헌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들의 환자들에게 성 제라드의 기도문과 메달을 주었다.

성 제라드가 그들이 건강한 아이를 갖도록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해 주었다고

확신을 갖는 부모들에 의해서 수많은 아이들이 제라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또한 소녀들에게도 이러한 이름이 주어졌다. 여러 가지 형태로 "제라드"라는 이름이

 여성화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중에서 인기많은 이름들은 제라다, 제랄린, 제라르딘, 제리안네,

그리고 제라뎃 이다.

 

 

단지 도우실뿐만 아니라

성 제라드는 어머니들과 아이들에게 대단한 은총을 얻도록 하지만 그것만이 그의 임무는 아니다.

그는 또한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에게, 그들의 삶 안에서의 의무를 가르친다.

오늘날 혼인 안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과 사회적 악은 피임과 낙태의 죄이다.

많은 이들이 건강이 나쁘다는 핑계, 혹은 경제적 부족이라는 이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이유아래,

교회에 의해 인식된 죄스런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의 가족을 제한하게 하는 다른 이들의 말을 따른다.

이러한 악에 대항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하느님께 무한한 신뢰를 두는 것이다.

하느님은 혼인성사를 만드셨고,

모든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그분이 혼인을 위하여 만든 혼인법으로

 필요한 모든 은총으로 충만케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

 

제라드의 특별한 덕 중의 하나는 신뢰이다.

그리고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모토는 "하느님이 준비해 주신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그가 어떤 신학생과 순례를 떠나는 도중에,

마지막 남은 동전을 제대에 바칠 꽃을 사기위해 사용했다.

그는 제대앞에 그 꽃을 봉헌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저는 당신을 위해 이 꽃을 사왔습니다. 이제 당신이 저와 저의 학생을 보호해 주소서."

그러자 주님은 여행에 충분한 돈을 준비해 주셨다.

 

또한 거짓된 고발이 그를 힘들게 했을 때,

자신을 변호하라는 모든 친구들의 충고에 대해

"이것은 하느님을 만나뵙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허약한 건강과 죽음의 위험 안에서도 제라드는 하느님께 대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제라드는 만약 그들이 반생명적인 것들을 회피한다면,

어머니들이 그들의 혼인이 반드시 하느님께 기초하고,

하느님 안에서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본받을 수 있는 모범으로서 자신을 보여주었다.

 

성 제라드 마젤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8월 1일

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인창동성당게시판1296번

 

구속주회는 1732년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1696-1787,주교,윤리신학자이며 고해사제의 수호성인)

성인에 의해 세워진 대표적인 활동 수도회로서

현재 약 6000여명의 회원들이 로마에 총원을 두고 78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Our Mother of Perpetual Help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드리는 구일 기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를 저희에게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신뢰와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부르나이다.

온갖 아쉬움과 위험과 고통 중에 드리는 자녀들의 청원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이 유래 깊은 성화 앞에서 구일 기도로 청하는 저희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시어

그 힘있는 전구를 깊이 체험하게 해주소서.

 

자애로우신 어머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을 서로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 안에 실천하게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이 저희 안에 날로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원의 힘을 얻게 됨을 믿게 하시고,

믿는 이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저희의 삶이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해주소서. 아멘.

 

-구속주회홈에서 www.cssrk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