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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9일 성 요한 에우데스 사제 /성 루도비코 주교

Berardus 2021. 8. 18. 12:32


 
 
8월 19일

성 요한 에우데스 사제

St. JOHN EUDES St. Joannes Eudes, C  
San Giovanni Eudes Sacerdote
(Ri, Francia, 1601 - Caen, 19 agosto 1680)
Born :14 November 1601 at Ri, Normandy, France
Died :19 August 1680 at Caen, Normandy, France
Beatified:25 April 1909
Canonized :1925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1610년 프랑스의 세에즈 교구에서 태어났다.
사제품을 받은 후 본당들을 순회하며 여러 해 동안 설교 했다.
신학교에서 사제들을 교육시키는 남자 수도회와
 윤락 여성들을 구제하는 착한 목자회를 창립했다.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신심을 꾸준히 증진시켰다.
1680년 세상을 떠났다. 
 
Society of Jesus and Mary(Eudists)
 
 
예수 성심회의 창설자이자 학자였던 사제 요한에우데스는
14세 되던 해에 예수회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모의 소망과는 달리 설교회에 입회하여 사제로 활동하였습니다.
 
한때 그는 노르망디에 만연된 전염병 희생자를 돌보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향후 10여년 설교가요,고해사제
그리고 얀세니즘의 강력한 반대자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성인은 1643년에 예수 마리아회를 세워 신학교의 정신적 방향을 바로잡고
일반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성인이 오늘날 크게 알려진 계기는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따 알라콕과 함께 예수 성심 공경 신심을 널리 전하고
성모 신심을 보편화 하는데 기여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Sacred Heart of Jesus
2003년6월27일.게시판1245번.
2004년6월18일.게시판182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대축일이며
성체 성혈 대축일 주간의 금요일에 지켜집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은 중세기에 와서 상당히 일반화되어 성 요한 에우데스는
예수 성심 신심과 그 축일 제정의 신학적이고 전례적인 기초를
확립하기에 이르렸습니다.
 
또한 1673년 12월 27일,
프랑스 방문회 수녀였던 성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예수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 공경과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알라콕 축일:10월16일,게시판700번,1423번.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Immaculate Heart of Mary
예수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
2003년6월28일.게시판1246번
2004년6월19일.게시판1827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순결하고 티없으신 성모 성심께 대한 신심은
17세기 성 요한 에우데스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는데
그는 성모 성심을 예수 성심과 긴밀히 연결시켰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교회는 이 신심에 대해 오랫동안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성모 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따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신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1805년, 비오 7세는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축일을 지낼 것을 허용하였고,
1855년에는 에우데스에 의해 만들어진 경문을 바탕으로 한 고유미사가 행해졌으며
1857년 고유한 성무일도 경문도 만들어졌습니다.
 
성모 성심께 대한 신심은 파티마에서의 성모 발현 후 더욱 널리 전파되어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파티마 성모 발현 25주년때
세계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봉헌하였고,
전교회가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축일:5월13일.게시판1157번,1760번.
 

1969년 이래로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을
 티없이 깨끗하는 성모성심을 기념키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신성사성은 1996년 1월 1일자 교령으로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에 ’선택 기념일’로 지내 오던 이 축일을
’의무 기념일’로 지내게 되었다.
 
성모 성심 공경은 예수 성심 공경과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예수 성심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나
인간은 배은하기 때문에 모욕된 사랑에 대하여 보속하는 사랑이 그 목적이지만,
성모 성심은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인 것입니다.
-(가톨릭홈과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지를 거의 모른다.
북프랑스 농가에서 태어난 요한은 7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그는 독실한 사제 선교사였다.
두 개의 종교 단체 설립자이며, 성모 성심과 예수 성심께 헌신한
 가장 위대한 선구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해서 24세에 서품을 받았다.
1627년과 1631년 사이에 심한 흑사병이 만연하는 동안
그는 관할 교구내에서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자원했다.
 
그는 동료들에게 감염되지 않도록 흑사병이 유행하는 동안
들판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다.
요한은 32세에 교구 선교사가 되었다.
설교자이며, 고해 신부로서 그의 인기는 점점 높아 갔다.
그는 몇 주일에서부터 몇 달에 이르기까지 백여 개의 본당을 다니면서 설교했다.
사제의 정신적 향상에 관심을 가진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교에 대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수도원 총장과 주교, 심지어 리슐리외 추기경에게도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그러나 바로 자기 원장이 찬성하지 않았다.
요한은 결국 기도하고 조언을 들은 후에 자신이 수도회에 떠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결정했다.
 

같은 해에 그는
에우디스트라고 하는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그 단체는 ’예수와 마리아의 회’로서 교구 신학교를 지도하며 성직자 육성에 헌신했다.
그 같은 그의 새로운 모험은 개별적으로 주교들의 인정을 받는 반면에,
특히 얀세니스트들과 그가 전에 있던 수도회의 몇몇 사람의 즉각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요한은 노르망디에 여러 신학교를 세웠으나 로마에 인가를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부분적이기기는 하지만 그가 재치있게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요한은 본당 선교 활동을 하면서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매춘부들의 서글픈 상황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임시 거처는 마련하였으나 설비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여러 명의 부인들은 돌보던 마들렌 라미라는 사람이 어느 날 그에게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려고 합니까? 성당이겠지요!
당신머리 속에 상상하면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곳이니까요.
그런 당신에게 진실로 원하는 것은 언제나 이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깨끗한 집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웃음은 그의 마음 속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 결과 그는 애덕의 성모 마리아 수녀회라는 새로운 수도 단체를 설립했다.
그는 자기 저서의 중심 주제 때문에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기도하다.
그것은 거룩함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범이신 마리아에 관한 것이다.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께 대한 그의 헌신으로 비오 10세는
그를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 공경의 아버지로 선포하였다.
성덕은 하느님의 사랑에로 온전히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여러 가지로 표현되지만 표현의 다양성은 하나의 진취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요구에 대한 관심이다.
요한의 경우에서는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이란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
본당의 모든 신자들, 성직을 준비하는 사람들, 매춘부들,
그리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을 본받도록 부름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우리의 소원,우리의 목적,우리의 중요한 임무는
그의 정신,그의 헌신,그의 애정,그의 욕망 그리고 그의 의향대로 살고 영향력을 미치며
스스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종교적 활동은 이 같은 목적에로 방향지어져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수행하라고 주신 의무이다."
-(성 요한 에우데스, ’그리스도인에 있어 예수의 통치와 삶’)-
 
 
성 요한 에우데스 사제의 (예수의 영광스러운 성심에서)
(Lib. 1,5: Opera omnia, 6,107,113-115)
 
구원과 참된 생명의 원천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참된 머리이시고
여러분은 그분의 지체라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스도는 여러분으로 볼 때 지체들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의 모든 것, 즉 그분의 정신, 마음, 육신, 영혼 그리고
그분의 모든 기능들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분을 섬기고 찬양하며 사랑하고 찬미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마치 여러분의 것인 양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볼 때 머리이신 그분의 지체들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여러분이 지닌 모든 기능들도 마치 당신의 것인 듯
그것들을 아버지를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데 열렬히 사용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여러분에게 속하는 것뿐만 아닙니다.
머리가 몸의 지체와 함께 살며 그들을 다스리는 것처럼 그분은 여러분 안에 계시고 생활하시며
또 여러분을 다스리기 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 안에서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정신이 여러분의 정신 안에, 당신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그리고 당신 영혼의 기능들이 여러분의 그 기능들 안에 있기를 원하시고,
또 "예수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드러나도록 여러분은 자기 몸에 하느님의 영광을 지니십시오."라는
바울로의 말씀이 성취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의 아드님께 속하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지체들이 머리에 결합되어 있듯 여러분은 그분 안에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닌 모든 것이 그 분께 접목되어 그분에게서 생명을 얻고 그분에 의해 다스려져야 합니다.
참된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신 그분 안에서가 아니라면 여러분에게 참된 생명은 없습니다.
그분을 떠난다면 죽음과 파멸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지향과 행위와 능력의 유일한 원리가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 살아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사도 바울로의 다음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체들이 머리와 함께 하나이듯이 여러분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그분과 함께 하나의 정신, 하나의 영혼, 하나의 생명, 하나의 의지, 하나의 지향,
그리고 하나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스도 친히 여러분의 정신, 마음, 사랑, 생명 그리고 모든 것이 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 위대성은 세례에서 기원하고, 견진과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다른 은총의 훌륭한 사용으로 말미암아 튼튼하게 되며,
무엇보다 성체 성사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세속은 우리 교회의 성인들을 향해 사회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는 기생물,
혹은 무위도식하는 자들이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이는 대단한 오해다.옛날의 은수자는 자신의 영혼 구원만을 가장 중히 여겨
세속을 떠나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수덕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자아 멸시와 금욕의 생활은 이기와 탐욕투성이인 세속에게
얼마나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는가?
또 그외의 성인들은 직접 자선 사업을 운영하거나
혹은 그런 사업에 적극 협력해 사회에 무수한 혜택을 베푼 일이 많았다.
성 요한 에우데스는 윤락여성들을 구원해 준 특이한 성인 중의 한 분이다.
 
그는 1601년 11월 14일 북 프랑스의 노르만디 주에 있는 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본직이 농업이었지만 의술(醫術)에도 약간 경험이 있었으므로
근방 주민들이 상처를 입거나 병에 걸린 경우에는 곧잘 가서 치료해 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매우 독실한 분이시며, 어려서부터
요한의 마음속에 하느님께 대한 깊은 관심을 심어 주었고
특히 하느님께서는 안 계신데 없이 곳곳에 다 계시다는 정신을 새겨 주는 데 노력했다.
그래서 어린 요한이지만 그 신앙에대한 열의는 보통 어른도 못 미칠 정도였으며,
그 당시의 어린이로서는 매우 드물게 일찍이 첫영성체를 했고
얼마 후에는 종신 동정 서원까지 발했다는 것이다.
 
그가 14세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카엔 시에 보내 예수회가 경영하는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의 부지런하고 성실함은 동료에게 비할 수 없었고, 학업은 우수했으며,
또한 그 학교에 조직되어 있는 마리아 공경회 회원들의 거울로서 칭찬을 받았다.
 
중학을 마친 그는 계속해서 철학을 전공했다.
그는 이때부터 장래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주님의 의향을 알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했다.
마침내 사제가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인 것을 확신하고
그는 아버지에게 그 뜻을 밝히고 승낙을 청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요한을 위하여 어떤 부유한 집 딸과의 혼담까지 이야기 하고 있었으므로
이 말을 듣자 처음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이해심이 많은 분이라 곧 그의 요구를 쾌히 승낙은 했지만,
수도 신부가 되느냐, 세속 신부가 되느냐에 대해는 쉽게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즉 아버지와 가족은 후자를 택하고 요한은 전자를 택했으나,
요한의 열심하 신심생활의 모습이며 변함없는 요청은 결국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마침내 그 아버지는 수도원을 향하는 아들에게 모든 축복을 주었다.
 
이리하여 그는 성 필립보 네리가 창설한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고
24세에 서품되었으며 그가 갈망하던 사제로서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성 필립보 네리 축일:5월26일.게시판1182번,1785번.
 
그런데 건강이 악화되어 충분히 일을 하기도 전에
 휴양을 하게되어 파리 근교인 어떤 농장에 가게 되었다.
본래 부지런한 그의 성격은 무위 소일할 수가 없어 성서를 연구하기로 했다.
그가 성서를 손에 든 때는 반드시 이를 완전하게 정독했고,
묵상에 잠겼을 때는 마치 하느님과 함께 노는 듯한 인상을 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끔 했다고 한다.
"성서는 성체 다음으로 우리 신자들의 보물이다."
그의 입에서는 항상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는 동안 1627년 , 그의 고향에서는 악성 페스트가 창궐하여
많은 주민이 이에 감염되었으므로 간호에 이바지 할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요한은 즉시 원장에게 허락을 받고 몇 명의 동료 신부와 같이 그 지방에 가서
 병자를 간호하며 임종자에게는 병자 성사를 주는 등 눈코 뜰 사이 없이 맹활약을 했다.
그런데 자신의 휴양은 하루에 두세 시간뿐, 그것도 의자에 기대서 잠깐 졸다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자들과 더불어 행렬을 하며 그 지방을 성모께 봉헌하고
질병 종식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올렸던 바 차차 병마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러나 이런 재화로 인해 인심은 험악해지고 아울러 신심도 퇴폐한 감이 있었으므로,
요한은 구호책으로 우선 묵상회를 열기로 하고 1개월내지 3개월 간의 신심행사를 시도해 보았다.
그 성과는 대단했으며 이에 용기를 얻은 그는 묵상회를 열기를 실로 백 열 두번 이나 했다.
그리고 청중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그는 알아듣기 쉬운 종교서적을 저술해
 일반에게 이를 읽도록 했다.
 
당시의 프랑스 교회는 얀세니오 이단 때문에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그 시급한 대책으로 신자들을 지도할 착한 사제들의 양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주교들을 재촉해 신학교를 창립하고서
그 회원들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도록 했다.
 
전에 베푼 묵상회 때 많은 윤락여성들이 회개를 했었다.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다시 그런 생활로 돌아가기 쉬우므로 그 대책으로
우선 신심이 깊고 열심한 주부와 과부들에게 선도를 부탁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 기초가 튼튼치 못해 아무래도 수녀들의 헌신적 활동이 필요함을 깨닫고
방문 수녀회를 초청해 그들을 일임한 후 그 회칙을 약간 수정해
 이를 ’착한 목자회’라 개칭했다.
 

요한은 이런 사업 때문에 대단히 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상식이 있는 사람까지 "동정 서원까지 발한 수녀들을, 아무리 회개는 했다 하지만
그런 추잡한 창녀들과 접촉시킨다는 것은 적당치 않은 일이다"하고 반대했다.
그러한 비난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항상 이러했다.
"참다운 사랑을 지닌 정덕은 결코 더러워지지 않은다.
이는 마치 더러운 곳을 비추는 태양의 광선이 더러워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의 공격은 오직 기우에 지나지 않았고,
그로인해 그 수도회는 아무런 추문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불행한 여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 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요한은 그 외에도 사도적 사업에 끊임없는 활동을 계속했다.
그런데 1680년에 병을 얻어, 그 해 8월 19일 잠자듯이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나이 79세였다.
그는 1909년 비오 10세 교황 때 시복되었고, 1925년 비오 11세 교황 때 시성되었다.
 
오늘날 그가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와 더불어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을 처음으로 시작했고,
이어서 성모 성심 공경이 보편화 되게 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능력을 받았으니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진실한 종이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나를 창조하셨으니
 
  나는 그분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내 자신을 희생으로 바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오로지 내 생의 목적이 있고
  관심과 사랑의 유일한 목표가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와 깨어 있는 시간이
  그 목표를 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나의 지상 선과 영혼의 완전한 안식을 찾을 곳이고
  내 마음과 또한 나의 참된 낙원이 있는 곳입니다.
 
  나는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사랑하렵니다.
  나는 또한 하느님께서 바로
  내 존재와 생명의 주인이심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떻게
  내 생명을 다할지 생각하렵니다.
 
  하느님은
  오직 우리의 선함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만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성요한 에우데스
 

 
Altar of St Louis of Toulouse - SIMONE MARTINI
c.1317.Tempera on wood,200x138cm(without predella).Museo Nazionale di Capodimonte,Naples


 
8월 19일
성 루도비코 주교

St.LOUIS of Toulouse
St.Ludwig of Toulouse
St.Ludovicus, E
San Ludovico d'Angiò (di Tolosa) Vescovo
Brignoles (Provenza), febbraio 1274 - 19 agosto 1297
Born :1274 at Nocera
Died :1297 of natural causes
Canonized :1317 .  작은형제회
 
 
그는 찰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84년, 그의 부친 찰스가 아라곤왕과의 해전에서 포로가 되자,
석방 조건으로 그의 아들 세 명을 보내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져,루이도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7년 동안 바르셀로나에서 지내면서 여러가지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하는 한편,
프란치스꼬회원들의 영향을 받아가며 공부하였다.
 
이윽고 그는 프란치스칸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철학과 신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1295년, 그가 석방되었으나, 아라곤 국왕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므로 그는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것을 물리치고는,  
"나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후 그가 뚤루즈의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보니파시오 8세로부터 관면을 받고 23세의 나이로 사제서품 후 착좌하였다.
그후 그는 로마로 가서 프란치스칸으로서 서원하였다.
 
그는 가난한 수도자로서 주교직을 수행하였으나,
뚤루즈 사람들은 그를 왕과 못지않게 공경하였다.
그의 신심과 자태는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주교관의 모든 화려한 물건을 배격하고 프란치스칸 답게,
오로지 프란치스칸에 알맞는 의복과 음식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것이다.
요한 22세로부터 아비뇽에서 시성될 때(1317),
그의 모친은 그때 생존해 있었다.
 
The Oath of St Louis of Toulouse-LORENZETTI, Ambrogio.
1324-27.Fresco.San Francesco, Siena
 
성 루도비코는 1274년 네아펠 왕의 왕자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애스빠냐에 볼모로 잡혀가서 작은형제들과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자유를 되찾은 후에 왕위를 포기하고 작은형제가 되었고,
22세때 툴루즈의 주교가 되어서도 작은형제회 수도복을 선호하고
사목자로서 겸손하고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이들을 열성적으로 돌보았다.
 
교회의 많은 봉사를 했고  톨로사의 주교가 되었다.
이곳에서 감옥에 갇친이 병든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아직 젊은 나이인 1297년 폐병으로 로마에서 선종했고 톨로사 교구의 주보 성인이 되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http://www.ofm.or.kr/-
 
 
St Thomas in Glory between St Mark and St Louis of Toulouse-CARPACCIO, Vittore
1507.Tempera on canvas, 264 x 171 cm.Staatsgalerie, Stuttgart
 
북 이탈리아 가톨릭 신학계의 두 혜성,
프란치스코 회의 성 보나벤투라와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존재가 사라진 1274년
남 이탈리아 상공에 또 하나의 혜성이 나타났다.
이는 프랑스 툴루스 주교로 성덕의 빛이 더욱 찬란했던 루도비코 성인이다.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축일:7월15일.게시판1274번,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축일:1월28일.게시판917번,1590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그는 시칠리아 섬의 왕 가롤로 2세의 아들이며
 헝가리의 왕 스테파노 5세의 딸 마리아를 모친으로,
또 프랑스 왕 루도비코는 아버지의 친족이고,
투린기아(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어머니의 친척이 되는 고귀한 신분으로서,
그의 졍결한 마음, 그의 독실한 신앙은 일찌기 타인들의 감탄을 사게 되었으나,
이처럼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왕후의 집안에도 하느님의 시련은 내려졌다.
즉 가롤로 왕에게 불만을 품은 시칠리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생포하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유폐한 일이다.
 
* 성왕 루도비코 9세(재속프란치스코회 주보성인)축일:8월25일.게시판989번,1331번.
*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재속프란치스코회 주보성녀)축일:11월17일.게시판756번,1474번.
 
 
왕은 4년후에 겨우 석방되었으나
그 대신 공작(公爵)50명과 왕자 3명을 인질로 남기게 된 것이다.
루도비코도 그 중 한사람으로 바르셀로나에 감금되어 갖가지 냉대와 모욕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처지에서도 조금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잃지 않고
잘 인내하며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리고 감금 중에 프란치스코회 신부의 지도를 받아
세속적 영화의 허무함과 사람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알고
더욱 더 세속을 싫어하며 하느님만을 사랑하려는 굳은 결심과,
부호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끊고 오직 가난한 생활만을 택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사모하여
때가 이르면 그를 본받아 모든 것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신성한 복음적 생활을 하려는 동경심을 갖게 되었다.
 

한 때 중병으로 위독하게 된 루도비코는
 만일 하느님께서 도움을 베풀어 낫게 해 주신다면
꼭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일생을 그분께 봉헌 할 것을 맹세했던 바,
즉각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 그 후 자유의 몸이 되어 나폴리에 돌아오자마자,
즉시 수도회 총장을 방문하여 자기의 수도원 지망을 표명했다.
그러나 총장은 부왕의 의사를 두려워하여 우선 승낙을 받아 올 것을 명했다.
 
루도비코는 아버지에게 하느님께 일생을 바치고 싶다는 소망을 알렸으나
본래 그런것을 반대하던 아버지는 펄쩍 뛰며
"세상을 버린다는 건 말도 안된다.
너는 아라고니아 왕의 여동생을 왕비로 맞아들여 내 상속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느님과 맺은 서원은 교황께 알리면 되지 않는가?"하며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나 루도비코의 결심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후세에 상속받을 천국의 보물에 비하면 현세의 왕위나 궁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하며
시종일관 뜻을 변치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아버지도 차남인 로베르토에게 그 상속권을 넘기기로 하고
루도비코의 수도원 입회를 승낙했다.
 
루도비코는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여 사제가 된 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집전 아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가 하느님과 맺은 서원대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것은 그 후의 일이고,
장엄한 종신 서원을 발한 것은 1296년 예수 성탄 축일 전날이었다.
 
*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676번,1403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St Francis and St Louis of Toulouse-SIMONE MARTINI.
1318,Fresco, 120 x 152 cm.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그는 한때 시칠리아의 왕자였고, 교황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주교였지만,
교구에 부임할때는 몸에는 검소한 수도복을 걸치고 맨발로써 부임했다.
그에게는 아버지이며 스승인 아시시 성자의 겸손과 청빈을 방불케하는 점이 있었다.
그는 신분에 맞지 않을 정도로 검소한 방에 거주하며 엄한 고행의 생활을 보내고,
그 수입의 태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며 매일 극빈자에게 어진 어머니와 같이 대했고,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심으로 노력했다.
그러자 그의 성덕은 온 천하에 알려져 그 주교를 탐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빨리 불러 가셨다.
1297년 7월 뜻하지 않은 열병에 걸려  루도비코는 병석에 누운 지 1개월만에 병자 성사를 받고
8월 19일, 열렬한 기도 중에 그의 순결 무구한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던 것이다.
그의 나이 24세요, 그 생애는 세상사람이 생각하는 평균 생명의 반도 못되는 짧은 세월을 이 세상에서
보냈으나, 남들이 백년에도 이룰 수 없는 공적을 남겨 놓았다.
1317년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