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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4월 25(일)[백]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Berardus 2021. 4. 29. 06:58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4월 25(일)

[백]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제1독서(사도 4,8-12)

제2독서(1요한 3,1-2)

복음(요한 10,11-18)


‘착한 목자’는 생명의 길입니다

푸른 풀밭과 고요한 물가로

우리들을 이끄시는 예수님은 생명 바쳐 사랑 실천하시는 분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 따르면 거룩하고 영원한 삶 누릴 것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입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 진리의 빛과 생명의 샘을 갈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착한 목자’는 그들을 ‘양들의 문’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기쁨과

참된 자아의 발견에 감사드리며,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시기를 청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목자는 중심 이미지입니다.

주님과 백성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 떼로 비유합니다.

이는 유목 시대에 뿌리내린 신념입니다.

목자는 광야에서 양 떼를 돌보고, 들짐승의 공격을 방어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도 그 발자국을 따라가며 찾아냅니다.

골리앗을 쳐 이긴 다윗도 양 떼를 지키다 사자나 곰을 잡은 목자입니다(1사무 17,34-37).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최고 의회에서

종교지도자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만은 알아야 한다고 선포합니다(제1독서).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사도 4,11; 시편 118,22)이십니다.

머릿돌은 존재의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사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제2독서).

기도로 현존하신 주님과 소통하고 미사에서 ‘생명의 양식’을 받습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의 선물입니까?

성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자녀들이 만나는 은총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신비롭게 활동하시며 자녀의 품위를 간직하도록 이끄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착한 목자’라고 계시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하신 말씀은

존재의 생명에 관한 깊고도 소중한 의미가 서려 있습니다.

어째서 주님이 ‘착한 목자’이실까요?

먼저 예수님은 ‘양들의 문’(요한 10,7)이십니다.

이 문으로 양들이 드나듭니다. 이 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누구나 푸른 풀밭과 고요한 물가로 인도되어 생기 돋아납니다(시편 23장).

이 문은 주님께서 앞장서시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길(요한 11,25)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양들을 알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십니다(요한 10,11.14).

목자와 양들은 음색을 알 정도로 서로 압니다.

안다는 것은 친교로 이룬 사랑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고 방어하며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칩니다.

끝으로 양들은 양우리 안에 한 양 떼로 삽니다(요한 10,16).

하느님의 자녀는 양 떼이고, 양우리는 ‘하느님의 집’인 교회입니다.

교회에 꼭 필요한 문과 머릿돌은 그리스도이십니다(교회헌장 6항).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시고,

부활하신 뒤에도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이하).” 하고 세 번이나 당부하십니다.

착한 목자가 다스리지 않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양우리의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도둑이나 강도는

재물을 훔치고 생명도 업신여기고 맙니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고 양도 자기 소유가 아니기에

이리 떼가 몰려와도 양들의 생명에 무관심합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을 때 참 기뻐합니다.

양우리를 떠난 양을 발견한 기쁨도 큽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양우리 밖에 있는 길잃은 양들을 데리고 와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로 살게 한다면 주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우리의 불순종에 따른 죄를 없애시기 위해 주님은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시어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교회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는 한 양 떼입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과 음성을 알고 사랑을 체험케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어 마음으로 가깝게 친밀감을 느낍니까?

우리가 깨끗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고 사랑의 삶을 충실히 살면 그분을 닮고,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게 됩니다. 이보다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알고 거룩한 삶으로 초대된 제자입니다.

신앙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주님 향한 깊은 믿음과 굳센 용기로 삶의 여정에서

불안과 두려움과 흔들림 없이 저마다 소명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양식입니다(요한 6,27; 10,28).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교회헌장 14항)

일상이 아무리 분주해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감하는 하루는 행복합니다.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1테살 5,16-18)”임을 압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존재의 소명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김창선(요한 세례자) -



[한주간 전례]

2021년 4월 26일 (월) [백]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0,1-10

팔레스티나 지역의 목동들에게는 두 종류의 큰 위협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리나 늑대 같은 야생 짐승의 출몰이고,

다른 하나는 순식간에 나타나 양을 둘러메고 사라지는 강도들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양 떼를 이끄는 목동들은,

어두워지면 임시 울타리를 세워 만든 우리에 양들을 불러들여 보금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양 떼가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취약한 부분은 문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불을 피우거나, 개를 풀어 두거나, 목동이 문지기가 되어 양들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이신 당신을 통하여 양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들짐승이나 강도들로부터 보호받아 생명을 얻고,

또 문으로 드나들며 풀을 찾아 먹게 됨으로써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문은 양들에게 생명과 풍성함을 주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 특히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기준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준을 통하여 양들에게 가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나의 기준에만 맞추어 양들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의 욕심과 수준에 맞추어 양들을 대하고 사랑한다면,

그 양들을 풀밭으로 보내 양식을 얻게 하거나 울타리가 되어 보호해 주기는커녕

그 양들에게 상처만 줄 것입니다.

마치 강도처럼 양들을 훔치고 죽이고 씨를 말리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으로,

곧 아픈 이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고 애끊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장 낮은 이를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목숨까지 내어 주시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착한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의 기준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지,

예수님의 기준으로 말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27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0,22-30

12월 중순,

겨울에 거행되는 성전 봉헌 축제는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인들을 몰아낸 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새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축제 기간 내내 촛불을 켜 놓고 압제의 어둠에 시달리던 그들이

자유의 빛을 되찾은 기쁨을 기념하였습니다.

기원후 1세기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이 성전 봉헌 축제를 더 장엄하게 지내며 하느님께서 메시아,

곧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구세주를 보내 주시기를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다그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들은 마카베오가 시리아 왕국을 물리쳐 승리한 것처럼,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힘 있는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당신 스스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시도록 하여

예수님을 반역죄로 죽일 근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시고,

다만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고 하시며,

“당신이 메시아요?” 하는 질문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내가 한 일을 보아라.”(요한 10,38 참조)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과 당신의 신성이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오로지 내어 주는 사랑만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온 생애가 양을 위하여 언제나 함께하고,

목숨까지 내놓는 삶이었음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나서듯이

우리에게 당신의 삶을 보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그분의 양이 될지,

다른 메시아를 찾아 나서는 ‘다른 양’이 될지 선택해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28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2,44-50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부분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하여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참하느님을 모시고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가 알게 해 주시고,

그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주님 성탄 감사송 1).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 주신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세상의 빛’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파스카 성야를 떠올려 보면,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솟아오릅니다.

죄의 어둠, 무지의 어둠, 사랑이 없는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한 줄기 빛을 비추십니다.

마치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밝히듯이,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어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이제 그 십자가 사랑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


2021년 4월 29일 (목)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가타리나 성녀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으며,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복음묵상] 요한 13,16-20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셔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는

당신 제자들과 사랑의 만찬을 나누십니다.

만찬이 끝나고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던 가운데에 체포되시고,

다음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이 마지막 시간에 당신의 큰 사랑을 더욱 극진히 보여 주시고,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맨발에 샌들을 신었습니다.

흙길을 다녀야만 하였던 당시 사람들은 외출하고 돌아오거나,

다른 집에 초대받아 가면 가장 먼저 종이 와서 더러워진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 일은 오직 종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끗하게 하실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그러나 늘 그렇듯 이 아름다운 말씀을 삶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2014년 8월 16일 오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꽃동네 희망의 집에서 장애인들과 만나셨습니다.

당시 행사를 기획하다 보니 정작 아이들과의 만남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아이 한 명당 60초가량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맞추어 연습을 하고 철저히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행사 당일 교황께서는 일정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가 행사를 준비하면서 시간에 사람을 맞추었다면,

교황께서는 오로지 가장 낮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셨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30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4,1-6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건너가셔야 할 시간이 되자,

사랑하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모범을 바탕으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당신의 마지막 길을 준비하시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나서서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길’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를 지닌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신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하느님이시면서 참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가는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여 주셨고,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뿐 아니라, 가난하고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치유해 주시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 안에 머무르면서,

그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할 때 “하느님은 사랑”(1요한 4,16)이시라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의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사랑은 돌보는 힘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드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드실 뿐 아니라 돌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드시고 돌보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


2021년 5월 1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4,7-14

교리를 가르치거나 강론을 할 때

‘우리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믿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쉽게 가르치고자 찾은 예화나 방법은 때로는 혼란을 불러 오고,

잘못된 것을 가르치거나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의 교리,

그 사람의 하느님만을 전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간청은 오늘날 우리가 잘못 드리고는 하는 기도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제가 생각하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 당신은 저에게 어떤 분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내 안에 가두어 버리고,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거나,

때로는 교회의 가르침이 나에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

하느님과 교회를 원망하거나 외면해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묵상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주님 뜻에 맞는다면,

우리가 하는 봉사가 그분의 일이라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유다인들의 박해와 내쫓음에도

기쁨으로 가득 찼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신우시기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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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은 성소주일입니다.
작년에 이어 코로나19로 인해

신학교에 방문을 할 수 없는 상황
초등부, 중고등부의 성소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에게
신학교 방문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무산됩니다.
그래도 우리 스스로 더욱 관심을 갖고

이들을 격려해야겠습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