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이 심하여 배가 전복되기 직전에
선장은 승객들에게 “가진 것 중 무거운 것부터
먼저 바다에 던져버리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각자 살기 위해서라도 무거운 것부터
자기 짐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때 배에 함께 타고 있던 사제 한 명은
가방에서 무언가 급하게 꺼내더니
‘성무일도’ 책을 바다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부님에게는 ‘성무일도’ 의무가
가장 무거운 짐이었던 것입니다.
‘성무일도’는 일명
‘시간경’이라고도 합니다.
새벽 세 시 ‘독서기도’,
여섯 시 ‘아침기도’, 아침 아홉 시
‘3시경’, 정오엔 ‘6시경’,
그리고 오후 세 시 ‘9시경’,
이어 다시 여섯 시엔 ‘저녁기도’,
그리고 마지막 밤 아홉 시엔 ‘끝기도’를 바칩니다.
위 일화의 사제가 가장 먼저 버리고
싶었던 짐이 ‘성무일도’였음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하고 싶은 시간에 기도하고,
또 하고 싶은 장소에서 기도하면 될 텐데
꼭 이렇게 규칙적인 장소와 시간을 정해놓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안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랜 시간
만나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우리가 친한 대부분 사람은
친해서 자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주 만나기 때문에 친해지게 된 이들입니다.
가족은 매일 저녁엔 집에 들어와야 하고
친척은 명절 때마다 모여야 하며
성당 친구들은 주일마다 만나는
약속이 정해져 있을 것입니다.
이 규칙적인 만남의 약속이
관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애인도 서로 만나고 싶을 때만 만나다가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매일 같은 집에서 같은 시간에 만나기 위해
결혼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싸워서 보기 싫더라도 어차피
함께 살아야 하니 결국은 화해하게 됩니다.
이렇듯 인간관계에서 시간과
장소의 약속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나약성 때문에 하느님은
전례의 절기와 장소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규칙적으로 당신을 예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거운 짐을 지워주어
고통을 주려는 이유가 아니라
당신께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선물과 같은 방편입니다.
성 베네딕도회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도자들이 성무일도 기도를 바치고 있다.
규칙적인 전례는 신자들을 꾸준하게 주님과 가까워지도록 이끌어 준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우리가 아는 바대로
전례의 주기는 1년 단위로 반복됩니다.
1년을 단위로 하는 전례력의 정점은
‘파스카의 성삼일’입니다.
나머지 날들은 “파스카라는 단 하나의
신비가 지닌 다양한 측면이 전개되는 것”
(1171)으로 보면 됩니다.
그래서 전례에서는 “오늘!”이라는
단어가 두드러지는데,
파스카를 통한 구원의 신비가
“우리 시간 안으로”(1168) 들어와
바로 “오늘!” 거행된다는 뜻입니다.(1165 참조)
그다음 중요한 전례의 단위는 ‘일주일’입니다.
파스카를 중심으로 한 전례의 흐름은
매주 “여덟째 날”마다 되풀이됩니다.(1166 참조)
본래 일곱째 날이
유다인의 안식일이고 토요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덟째 날이 주님의 날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주님 부활의 신비를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하기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인
“태양의 날(일요일)”을 일주일의
가장 거룩한 날로 여깁니다.(1166-1167 참조)
그리고 전례 최소 단위인 ‘하루’가 있습니다.
‘성무일도’는 “낮과 밤의 모든 흐름이
하느님 찬미를 통하여 성화되도록
이루어져 있습니다.”(1174)
교회는 이 밖에도 성체조배와 여러 개인
신심 행위들을 통해 ‘규칙적’으로
주님을 만나도록 장려하고 있습니다.(1178 참조)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자신에게 갑자기 다가오려는 어린 왕자에게
규칙적인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더 친해지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여우는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기도를 몰아서 한 번에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규칙적인 기도시간이 있어야 그 약속을 위해
미리부터 만남을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전례는 이렇게 마치 대나무가
규칙적인 마디를 형성하며 자라나듯,
우리를 조금씩 그러나 멈추지 않고
주님과 가까워지도록 이끌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