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 대축일> (2020. 11. 1.)(마태 5,1-12ㄴ)
<희망>
성경을 몰라도 묵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또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묵시 7,2-4).”
여기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도 ‘상징’이고,
십사만 사천 명도 ‘상징’입니다.
(‘144,000’은 ‘12 곱하기 12 곱하기 1,000’으로 풀이되는데,
성경에서 ‘12’는 ‘완전함’을 상징하고, ‘1,000’은 ‘아주 많음,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144,000’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과
그 수가 많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실제 수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된 해석입니다.)
묵시록에는 ‘십사만 사천 명’을 언급한 뒤에 다음 말이 나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는 말은,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 수가 아니라 상징이라는 근거가 되고,
또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상징이라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사람들’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묵시록의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많은 사람이 못 들어간다.”,
또는 “적은 수의 사람만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이론적으로는, 자격만 갖추면 인류 전체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격을 갖추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들어가는 사람의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가, 아닌가?”입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루카 13,28).”
밖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밖’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고, 응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즉 밖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밖에 있는 자들의 후회와 절망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과 고집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뒤늦은 후회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묵시록은 ‘안에 들어간 사람들’,
즉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말이기도 합니다.
‘큰 환난’은 종교박해를 가리키는 말인데, 넓은 뜻으로는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는 말은,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믿음’만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믿음을(마태 7,21)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5-17).”
이 말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안식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 행복과 안식은
지상에서의 인생의 고단함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습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인생은 허무한 여행일 뿐이다.”입니다.
오래 살았든지 짧게 살았든지 간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든지 그렇게 살지 못했든지 간에,
인생이란 결국에는 먼지처럼 사라지는(시편 90,3-6) 고달픈 방랑일 뿐입니다.
그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모든 성인 대축일’은 ‘희망의 대축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인생의 끝은 허무가 아니라
‘영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노력하면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 행복과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로마 8,20).”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 8,24-25).”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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