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영성 이야기]
어머니께 어머니처럼
어머니의 어머니로 살았던 그 시간, 모녀는 꽃길을 걸었다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때는
어머니를 떠올려 보면 답이 나온다
누가 우리를 어머니만큼 보살펴 주고
기다려 주고 용서해 주고 다시 받아주었던가
‘버림받으신 예수님’께서 계셨던
그 언덕을 생각하면 십자가 곁의
또 한 분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어머니’라는 호칭 대신
“여인이시여”라고 불리며
아드님에게서 ‘버림받으신’ 성모님이시다.
당신 아드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땅에 온몸이,
공기 중에 심장이 못 박히셨던 그분.
잉태 후 열 달을 견디시고,
품어 키우시고,
집 떠난 아드님을 뒤따르셨지만
급기야 다른 이를 아들이라고 맡기는
폭탄선언을 들으셔야 했던 모정.
그 순간 텅 비워졌을 그 가슴.
살면서도 몇 차례나 아드님에게서 내쳐짐을 겪으셨으니,
열두 살 때 이미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고,
먼 길을 찾아갔을 때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급기야 십자가 곁에서는
오직 한 분 아드님을 비워 내고
그 빈 가슴에 모든 인간을
자녀로 받아들여야 하셨던 분.
성모님의 온갖 덕이 절정에 이른 순간도
고통이 극에 달한 바로 그때가 아니었을까!
끼아라 루빅도 우리에게 성모님을 사랑한다면
‘또 다른 마리아’가 되어 살자고 하며,
모든 이의 어머니가,
어머니에게까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나의 어머니께서
여든 고개를 넘기실 즈음
알츠하이머병 증상을 보이셨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 일은 사실이었고,
나는 세상일을 접고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
어머니께서도 여느 환자와 다름없이
초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셨다.
느닷없는 분노와 텅 비어 버린 기억 탓에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의지를 다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런 행동이 뜻하는 바를 알아듣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아기여서 아직 사람의 말을 익히기 전에
우리 어머니들이 그러셨으리라.
울음이나 몸짓 하나만으로도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채시고 해결해 주셨으리라.
그래서 나는 말 그대로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어머니의 눈높이로 사랑해 드리고자 애썼다.
조금씩 안정이 되자
어머니께서도 당신 나름의
사랑 표현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역시 어머니셨다!
그렇게 함께 울고 웃으며
아흔넷에 하늘나라로 떠나실 때까지
나름 평화롭게 잘 지낼 수 있었다.
어머니의 모습을 이해하게 되니
그 경험들을 이웃들과 나눔으로써
병환 중에 계시는 분이나 돌보는
가족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을 모아
「어머니의 꽃길」이라는 수필집을 내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소감을 듣게 되었다.
덕분에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과
다른 문학상들을 받을 수도 있었다.
지나서 생각해 봐도
그때야말로 어머니께나 나에게나 꽃길이었다.
외동딸을 먼 나라로 시집보내고
홀로 지내시는 친구 어머니가 계시다.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리곤 하는데
며칠 전에는 저녁 내내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혹시나 해서 친구에게 어머니 잘 계시는지
넌지시 문자를 보냈더니
요즘 어디가 좀 불편하신 듯하다는 답이 왔다.
내일은 꼭 찾아가 보리라 생각하고도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이미 자정이 가까웠지만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틀니가 잇몸에 부딪쳐서 식욕도 잃고
아무것도 잡숫지 못해 초췌해진 얼굴이 거의 반쪽이셨다.
기력을 잃어 전화벨 소리도
못 들을 만큼 까라지셨던 것이다.
병원으로 모시려 해도 내일은 꼭
링거를 맞으시겠다며 밀어내셨다.
다음 날 마와 잣을 넣고 미음을 쑤어
보온병에 담아서 가져다 드리니 내치시면서도 다 드신다.
반갑고 고맙다는 속뜻이 읽혔다.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때는
어머니를 떠올려 보면 답이 나온다.
누가 우리를 어머니만큼 보살펴 주고
기다려 주고 용서해 주고 다시 받아 주었던가.
그런 사랑을 이웃과 나눌 때
우리도 조금씩 성모님을 닮아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장정애 (마리아고레띠·마리아 사업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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