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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8월 2일 (일) [녹] 연중 제18주일

Berardus 2020. 8. 1. 09:01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8월 2일 (일)
    [녹]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 (이사 55,1-3) 제2독서 (로마 8,35. 37-39) 복음 (마태 14,13-21)
    사랑은 환대입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은 성찬례 예표이며 마지막 잔칫상 성체를 모시는 그리스도인의 특권 주님 몸을 생명의 빵으로 내놓으신 사랑의 환대로 영원한 생명 누려

        연중 제18주일의 말씀은 우리를 주님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의 빵’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니 생기 돋아납니다. 당신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성사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주님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새롭게 합니다.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습니다. 그 신비는 하늘나라의 완성을 갈망하는 교회를 통해 드러납니다. 교회는 말씀의 씨앗이 자라 사랑과 정의의 열매를 맺고 하늘의 평화를 누리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주님의 집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은 ‘주님의 종’의 노래로 메시아의 모습을 전한 이사야 예언자(기원전 8세기)가 알리는 주님의 초대장입니다. 목마른 사람, 가난한 자, 고생하는 이들도 주님의 식탁에 무상으로 초대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변치 않는 자애’이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좋은 음식을 즐기는 ‘지혜의 잔치’이며, 살아계신 주님과 맺는 ‘계약의 잔치’ (이사 55,2-3; 잠언 9,5-6; 2 사무 7장)입니다. 잔치를 베푸신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십니다.” 제때에 먹을 양식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손길, 가시는 길마다 의롭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신 주님의 자애에 감사드립니다(시편 145, 화답송).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밝히듯이 사랑의 힘은 강합니다. 사도께서 선교여행을 통해 체험한 환난, 역경, 박해, 가난, 파선을 포함한 온갖 위험을 극복한 힘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성사를 통해 지금도 계속됩니다. 삶과 죽음, 천사와 사탄, 현세와 내세, 천상과 지하의 어떤 피조물의 세력도 이 사랑에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 요한 4,16).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위대한 사랑의 힘을 발견합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구원의 희망은 굳건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삶의 현실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신앙의 걸림돌마저 뛰어넘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요한 세례자의 죽음을 가져온 헤로데의 생일잔치(마태 14,3-12)와 갈릴래아 연안의 외딴곳에서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 사건 (마태 14,13-21)을 대조시킵니다. 헤로데 잔치는 궁중에서 사전에 계획된 잔치로 교만의 분위기에서 요한의 죽음을 불러일으키지만, 주님은 외딴곳 풀밭에 몰려든 군중을 따뜻이 맞이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찬 사건은 네 복음 모두 자세히 전하는 주님 기적으로는 유일합니다. 요한 세례자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외딴곳 (벳사이다, 루카9,10)으로 물러가십니다. 여러 고을에서 소문을 듣고 육로로 모인 군중을 보신 주님은 연민의 정을 보이십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그들을 돌려보내 각자 사서 먹도록 건의를 드리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가진 것이라곤 어린이가 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요한 6,9)뿐인데 말입니다. 군중을 풀밭에 자리를 잡게 하신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봉헌물이지만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오천 명이 모두 배불리 먹은 뒤, 제자들이 남은 빵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할 정도로 충만했습니다. (마태 14,19-20). 빵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주시는 모습은 마지막 만찬의 정취 (마태 26,26; 마르 14,22; 루카 22,19; 1코린 11,23)입니다. 이 빵의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일(탈출 16장)을 연상시킵니다. 이는 바로 성찬례의 예표이고, 하늘나라의 마지막 잔칫상(마태 8,11; 26,29)입니다. 미사성제에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는 그리스도인은 특권을 누립니다. 성사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생명의 빵’으로 내놓으신 사랑의 환대입니다. 성체를 모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과 친교로 ‘한마음 한 몸’이 된 우리는 가슴에 사랑의 불꽃을 간직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는 주님의 크신 사랑에 보잘것없는 사랑으로 보답하면서도 영적 기쁨을 누립니다. 가난과 질병, 불의와 재난에 희생된 사람들이 우리 이웃에 한둘이 아닙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서로 밥이 되어주십시오” “나눔은 사랑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기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렵니다.” (요한 6,27) 축제의 날인 주일에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 14,16).” 하신 주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삶의 현장에 나아갑니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한주간 전례] 2020년 8월 3(월) [녹]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4,22-36 멍에는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둥그렇게 구부러진 막대로, 마차나 쟁기처럼 짐을 당기거나 무거운 짐을 옮길 때 힘을 분산시켜 작업을 좀 더 수월하게 수행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멍에는 ‘예속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에는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것만을 전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정복한 이의 멍에가 부수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주신 진실을 전하며, 정복자의 나무 멍에가 부수어지지만 실제로는 부수어지지 않을 쇠 멍에로 바뀌는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흘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께서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당신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1,30 참조). 그렇다면 가혹한 현실 속에 죽음의 파멸로 이끄는 쇠 멍에가 아닌, 녹록하지 않은 삶 속에서도 우리를 안식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멍에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이야말로 그 답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돌아서서,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외치며,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 (욥 9,8)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실 때는,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가장 약할 때, 하느님께서는 가장 강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낙담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신다면, 믿음의 여정을 멈추지 말고 계속 가야만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믿음이 약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용기를 내어 다가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참된 신앙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섬기는 일은 예속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 안에서 자신을 기꺼이 내놓는 일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4일 (화) [백]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1786년 프랑스 리옹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산 그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1859년 선종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하고, 4년 뒤에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5,1-2.10-14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가 사마천의 역사책 『사기』에 보면, 어떠한 명의라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여섯 가지 불치병에 걸린 환자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환자가 교만하고 방자하여 내 병은 내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고 돈과 재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음식을 적당히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며, 네 번째는 음양의 평형이 깨져서 오장의 기가 안정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입니다. 다섯 번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도저히 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며,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못하는 환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은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황을 묘사하면서, 이스라엘을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고 아무도 돌볼 수 없으며 정부들에게 잊힌 백성으로 소개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이러한 상태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느님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상처의 치유자로 나서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신탁은 마무리됩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상처가 회복되더라도 재발하여 불치병이 될 수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만드신 하느님보다 문자에 얽매여 조상들의 전통을 더 중시하는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들 때문입니다. 이 불치병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입 밖으로 내보낸 데서 비롯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럴싸한 위선으로 ‘하느님께서 심으신 나무의 햇순’(이사 60,21 참조)을 뿌리째 뽑힐 초목으로 모두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불치병은 위선과 아집으로 무장된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치유하시는 의사로 나서시더라도 우리가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결국 죽음의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5일 (수) [녹]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5,21-28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은 모두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신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졌던 체험을 다시 하게 되리라 상상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야에서 누린 바 있던 하느님의 자애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섭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화답송도 독서에 이어지는 주님의 신탁으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그런 다음 마태오 복음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애를 확인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이민족이라는 출신의 약점을 넘어서 진정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처사에도 끈질긴 구애는 마귀 들린 그녀의 딸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시킵니다.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출신이나 병듦의 약점이나 약함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이라는 장점과 강함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을 묵상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바오로 사도의 고백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6일 (목) [백]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오늘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9월 14일)의 40일 전에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7,1-9 오늘 복음에 나오는 ‘높은 산’을, 학자들은 헤로몬산 아니면 타보르산으로 추정합니다. 헤르몬산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바로 이어질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는데, 산의 높이가 2,814미터에 이릅니다. 그러나 교회 전통은 높이 575미터인 타보르산을 주님의 거룩한 변모 장소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나자렛과 가깝고, 당시 초기 교회의 성지 순례 여정의 불편함을 덜어 주었기에 일반적으로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산의 정확한 위치나 높이보다 산에서 이루어진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우리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자의 상징인 모세,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시며 진정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맛보게 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걸을 때 그들이 인식해야 할 주님을 엿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영광을 보지만, 동시에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깊이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6-9).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7일 (금) [녹]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6,24-28 ‘나훔’ 예언자의 이름의 의미는 ‘위로받은 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역할은 이름의 뜻과 달리 ‘위로를 주는 이’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가 맹위를 떨치던 어두운 시대에, 강자의 희생자가 되어 고통을 겪던 유다 백성에게 주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 아시리아의 패망, 유다를 향한 위로, 그리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멸망에 대한 묘사는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시지만, 불경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보복하시는 분” (나훔 1,2)이심을 강조하면서, 인류의 미래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안에 절대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화답송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처럼 하느님께서는 희생당하는 당신 백성을 대신하여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원수들에게 되갚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서 볼 수 있듯 ‘의로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주시는’(마태 5,10 참조) 위로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됨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당신에 대한 배척, 수난 그리고 죽음을 앞두시고 적대자들에 대한 보복은 하느님께 맡기시고,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께서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이의 본보기가 되십니다. 따라서 불경한 자들에게는 보복을, 의로운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통하여 온전히 드러납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셈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8월 8일 (토) [백]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도미니코 성인은 1170년 스페인 북부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덕을 쌓는 데 몰두하던 그는 사제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적인 설교로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었다. 도미니코 사제는 1206년 설교와 종교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세우고 청빈한 삶과 설교로 복음의 진리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강조하였다. 1221년에 선종한 그를 1234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7,14ㄴ-20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지체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오늘 독서에서 하바쿡 예언자는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비록 유다 왕국이 잘못하여 바빌로니아를 하느님의 도구로 삼으신 것을 인정하지만, 악인이 의인을 처벌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번민하다 하느님께 따졌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는 모두 스러질 것이며, 오직 의인들만이 ‘성실함’을 통하여 살게 되리라고 답하십니다. 이처럼 믿는 이의 삶에 근거가 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의인의 성실함은, 화답송의 시편 저자가 노래하듯 “당신을 찾는 이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성실함에서 비롯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하바쿡에게, 겉모습은 그렇지 않게 보여도 분명히 실재하는 당신의 성실함에 관한 환시를 주십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정해진 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여 의인의 성실함 대신 존재의 가벼움을 드러낸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토로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갈라 5,22 참조). 우리의 인내가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으로 드러나도록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인내가, 바로 의인의 성실함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께서는 변치 않으시는 분,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아무런 아쉬움 없고, 하느님만으로 넉넉하도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서울 올림픽대로에서 비 온후 석양 장마로 인하여 충청지방에 큰 피해가 났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연이은 비 피해소식입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도 잠시 석양에 붉게 물들어 주위에는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잠시라도 여유를 갖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