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5월 31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청소년 주일 제1독서(사도 2,1-11)
제2독서(1코린 12,3ㄷ-7. 12-13)
복음(요한 20,19-23)
그뉴 노멀 시대와 성령의 숨
성령은 ‘하느님의 숨’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
예수께서도 숨을 통해 새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초대
‘새로움’은 하느님께 받은 생명에로 돌아가는 것이며
피폐해진 지구와 인류를 창조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
‘뉴 노멀’(New Normal).
새롭게 보편화된 사회·문화·
경제적 표준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수습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서,
방향을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될 국면에
다다랐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뉴 노멀 시대’의 도래는,
어쩌면, 기존의 ‘정상’적 삶이
얼마나 정상이 아니었는지를,
얼마나 많은 과잉과 가식,
위태로움을 품고 있었는지를
역으로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아닐까 합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우리의 일상을 주도해왔던
경쟁적 소비와 인간의 상품화,
그로 인한 ‘피로사회’가,
실은 우리 스스로 초래한 모순이며
빈곤임을 똑똑히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본문들은 온통
‘새로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움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 복음의 맥락
‘오순절’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성들이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에 모여 기념한
유다인들의 3대 순례 축제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는 밀 수확을 감사드리는 농경사회의 축제로
‘맥추절’이라 불렸는데, 무교절을 지낸 후
7주간 후에 지낸다고 하여
‘칠칠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 사이에는
점차 ‘오순(五旬)절’(히브리어
‘샤부오트’)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는데,
무교절 후 7주간이 지나 50일이 되었을 때
축제를 지내기에 붙은 명칭입니다.
이렇게 풍요로움을 감사하는 유다인들의 축제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더욱 그 충만함을 배가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의 오순절 축제 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봉독되는 성경 본문은 언제나 동일하므로,
왜 성령을 ‘바람’ 혹은 ‘숨’의 이미지로 표현해왔는지,
고대로부터 바람과 숨이 왜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자의 작년 말씀묵상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선물로 제시된
‘소통’
(제1독서에서 강조된 각자의 언어를
모두 자기말로 이해하고 알아들음)과
‘일치’
(제2독서의 각 지체가 하나의 몸을 이룸)에
대해서도 작년 내용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묵상은 복음에 집중하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성령을 받아라
요한복음은
성령을 받게 되는 상황과
그 경위를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는데,
각각의 표현들은 매우 깊은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과 동일한 날,
바로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요한 20,19)이었습니다.
부활은 매우 이른 아침에 발생하고
성령을 받은 일은 그날 저녁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유다인들의 안식일(주간 마지막 날)
전통과 비교되는 그리스도교적 전통
(주일, 주간 첫째날)을 부각시킵니다.
2)굳게 잠긴 문:
예수님의 처형 이후
제자들은 모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굳게 잠겨있던 문’은,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식하게 하는 장치가 되는데,
문이 아무리 굳게 닫히고 잠겨있었다 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일은 이러한
장애를 쉽게 넘어섬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3)제자들 가운데 서심과 평화의 인사:
평화의 인사는
유다인들의 일상적 인사 ‘샬롬’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샬롬’(평화)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것이 충만해져 더 이상 싸울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작년 연중 14주일 말씀묵상 참조)
이러한 인사를 제자들에게 건네셨다는 것은
이제 완성과 충만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서시어’라는 표현은
이렇게 충만한 ‘샬롬’이,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서실 때에만
가능한 은총임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4)상처를 보여주심: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심으로써
부활이 단순히 환영이나 상상이 아님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20절)고 합니다.
상처를 온전히 유지하고 부활하셨다함은
상처를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상처를 가진 채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부활임을 알려줍니다.
5)성령을 불어 넣어주심:
성령을 받음은
두 번째 평화의 인사 직후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21절)라고 하시고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22절) 숨을 불어 넣으시는 모습은
창세 2장 7절에 등장하는 아담의 창조를 연상시키는데,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생명을 주시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인간이 신비로운 이유는
하느님의 숨으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6)죄의 용서:
하느님의 숨을 받은 제자들은
하느님의 성령을
그들의 존재 안에 받은 것이기에,
이제 하느님의 권한 즉
용서의 권한까지 받게 됩니다.(23절)
이는 제자들에게 전권이 주어진 것과
예수님의 권한이 이제 제자들을 통해 지속됨을 선언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이고,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숨으로 우리는 새로움에 초대되는데,
사실 성경이 제시하는 ‘새로움’이란
우리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미지의 낯선 현실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충분히 받은
생명에로 돌아가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고
그분의 창조도 이미 완전했기에
더 이상의 ‘새 것’은 필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
‘새 것’으로 창조한 것이었지만
인간의 탐욕과 원죄로 퇴색되고
‘헌 것’이 되어버린 상처와 자국들을,
성령의 ‘숨’을 통해 본래의 ‘새 것’으로
다시 복원하는 것이 ‘새로움’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뉴 노멀의 시대’로의 진입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병들고 피폐해진 지구와 인류를,
보시니 좋았던 바로 그 창조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
인간이 보존하고 지켜내야 할 본연의 존엄과
가치들을 우리 삶의 중심에
다시 질서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덜 경쟁하고 덜 소비하며 덜 투쟁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하고 더 안전하며 더 생존할 수 있습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용인 은이성지성당
[한주간 전례]
2020년 6월 1(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교부 시대부터 쓰였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에서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마리아는 성령 강림 이후 어머니로서 교회를 돌보았고,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9,25-34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아드님을 두고
성모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드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담아
그 곁에 ‘서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행동에서 예수님을 향한
성모님의 믿음이 얼마나 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던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형수가 되신 마당에
그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이라도 되면
큰일 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로마 군사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위협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 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영어로
‘이해하다’(understand)는 말은,
‘밑에’(under)라는 말과
‘서 있다’(stand)가 합쳐진 것입니다.
곧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 밑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밑에 묵묵히 서 계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선악과 나무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온 인류의 죽음을 낳았습니다. 그
러나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어 골고타 언덕 한가운데에 있는
십자가 곁에 끝까지 서 계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열매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나아가 새 인류의 어머니, 새로운 하와가 되셨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2일 (화) [녹]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13-17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하여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 주시며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들은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과연 사람들의 이 대답은 맞는 것이었을까요?
황제는 누가 창조하였습니까?
누가 황제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하느님 아니십니까?
세상에 어찌 황제의 것,
하느님의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치적인 것은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신앙적인 것은 종교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황제의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회가
복음의 빛을 받아 각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발생하는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과 관련된
정치 문제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2246항 참조).
부조리와 불평등, 억압과 폭력으로
많은 이들이 신음하고 있는데도,
모든 이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라고 선을 긋고 무심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께서 마음을 쓰시는 만큼
교회는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태도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2020년 6월 3일 (수)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처형당하였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복음묵상] 마르코 12,18-27
6월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6월은 예수성심 성월로 예수님께 더욱 의지하며
이 모든 어려움이 극복되길 기도합니다.
또한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던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조심하는 시기입니다.
고객님 모두 건강한 한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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