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시라는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일곱 배로 갚아 주시리라고 가르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무엇을 버린 사람은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투자 수익률 일곱 배, 또는 백 배일까요?’
인간적인 계산에 따라
이렇게 수익률이 높고 보장된다면 해 볼 만한 거래임에 틀림이 없겠지요.
더욱이 주님께 예물을 열심히 바치면 축복을 많이 받을 거라고
자신 있게 강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셈법으로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께 뇌물을 바치지 마라.
받아 주지 않으신다.”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방식으로
어떤 이득을 얻어 내려고 건네는 것이 뇌물이지요.
하느님께서는 공정하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당신께 무엇을 드린 사람이라고 무조건 잘 보아주시지는 않으십니다.
화답송 시편에서 노래하였듯이,
우리의 번제가 늘 하느님 앞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불의하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복음에서도, 가족과 재산을 버리는 것은 백 배로 돌려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에서도,
각자가 받을 보상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님을 일깨우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보상은 이 세상을 초월한다는 것,
곧 현세의 보상보다는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는 데 무게의 중심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말씀대로 종말이 되면 현재의 서열이 뒤바뀌어
첫째가 꼴찌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첫째와 꼴찌의 기준은 하느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사람의 행동의 동기마저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 관계에서도 흔히 경험합니다.
베푸는 사람에게는 돌아오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돌려받으려고 주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 일종의 거래이기 때문에,
이미 순수성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예물이,
아무런 계산이 없는 깨끗한 제물이었으면 합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복음 환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