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드는 이.
죄인들과 함께 인간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사건은
죄로부터 해방과 구원 이루시려는 의로움의 시작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님 신원이자 정체성
주님께서 선택하시고 성령과 힘 부어주심을 선언
대체 그분은 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학술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던 학부 3학년 무렵,
몸살처럼 제 안에 들어온 질문이었습니다.
오로지 고통의 길에 들어서려고
작심하신 듯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가난하고 나약한 이들에게만 특별한 애정을 갖는
위태로움을 받아들이기 난감했고
그분에 대해 좌절감을 느낄까봐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렇게 신학에 입문한지 30년이 넘은 지금에야
비로소 그 위험해보이던 예수님 일생은,
모멸이나 굴욕, 실패가 결코 ‘패배’의 동의어가 아님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는 기쁜 소식임을 깨닫고,
그 어처구니 없는 사랑에도 조금씩 동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죄인들 틈에 끼어서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죄인들 틈에 끼어 십자가형을 받으심으로써
공생활을 마치신 예수님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누구도 패배시키지 못했던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지 그분의 정체성을,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이 드는 아들”(마태 3,17) 이며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이사 42,1) 라고 장엄히 선포합니다.
■ 복음의 맥락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일에도 유사한 주제가 지속됩니다.
동방에서부터 빛나는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박사들처럼(마태 2,1-2)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이 있는 요르단 강으로
몸소 오시는 여정을 감행하십니다.
두 사건 모두 긴 여행과 이를 통한
‘공적 드러남’(公顯, Epiphany)이라는
주제로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30년간의
숨은 생활과 침묵을 뒤로 하고
이제 공개적인 생활의 시작과
그 결단을 알리는 공적인 드러남,
즉 두 번째 ‘공현’이었던 것입니다.
■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사건은 요르단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요한 자신에게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마태오복음서는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하며
당혹스러워하는 요한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요한의 이러한 주저함에 예수님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15절)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선언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시려는 예수님은,
물속까지 내려가는 행위를 통해
죄인들을 위한 구원사업에 돌입하시고,
공생활의 마지막에도 역시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시고 땅 속 깊이까지 내려가심으로써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이룩하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이루어야 할 모든 의로움’이신 것이고,
따라서 공생활 시작인 세례 때 언급된
‘의로움을 이룸’은 공생활 마지막에 ‘이루실
의로움’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구원 사업의 시작을 알리신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직접적으로 소통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 것”(17절)을 ‘보게’ 되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17절)라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직접 보고 직접 듣는 일이 발생하면서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 것인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그들의 죄를 없애시고 의로움을 이루신 예수님은
진정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존재이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내 마음에 드는 나의 종
회개와 정화가 필요한
사람들 사이에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그 여느 인간과도 달리
여기지 않으시려는 의지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제1독서에서 제시된 ‘주님의 종’의 모습에서도 발견됩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독서의 내용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기원함을 부각시키며 시작됩니다. “
주님께서” 그를 선택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며
붙들어 주시기에(이사 42,1) 종은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자기 생명과 삶 전체로 주님의 뜻을 증언합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나의 종”으로 불린 이들은
아브라함(창세 26,24), 모세(민수 12,7), 칼렙(민수 14,24),
다윗(2사무 7,5), 욥(욥 1,8)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하느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직접 “나의 영”을 주시는데
이점이야 말로 ‘종’이 가진 권위 중
가장 분명하고 탁월한 권위였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면밀히 계획하시고
선택하셨음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 분
제2독서의 베드로의 연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께서…성령과
힘을 부어주신” 분이시기에 언제나
하느님께서 “함께 계셨다”고 선언합니다.
‘종’으로 묘사된 이는(제1독서) 이제 ‘아들’로 묘사되고(복음)
그분이 모든 이들의 ‘주님’이라고(제2독서)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다’라는 표현을 검색해보니
‘어떤 것이 마음 안으로 들어옴’
‘그것이 흡족하고 기쁘며
좋게 여겨진다는 의미’라는 해설이 나옵니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나의 영역을 넘어
타자에게 들어가는 초월(超越)의 행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안에 안주하며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랑은 도무지 확장될 수도 소통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초월의 의지를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이러한 예수님의 의로움은
이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또 하나의 초월이 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때로는 위험하고
위태롭기도 한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시며
자신을 진정한 의로움과 진리로 ‘공현’하시고,
그분만이 이룩하실 수 있는 경이로운
구원의 역사를 쓰시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곧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한주간 전례]
2020년 1월 13일(월) [녹]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14-20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드러난 종말의 완성입니다.
종말은 저 멀리 떨어진 꿈 같은 시간이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의 결단의 자리에 있습니다.
종말은 기다릴 실재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실입니다.
그래서 급합니다.
우리의 결단이 급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을 학자들은
‘급한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서 빨리 종말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종말은 시작되었다고 재촉하는 복음이
마르코 복음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에는 ‘곧바로’,
‘즉시’라는 표현들이 넘쳐 납니다.
제자들도 급하게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사는 고귀한 이들이 아닙니다.
고기 잡고 그물 손질하는 이웃집 아저씨들,
그들이 제자가 된 이유는 바로 ‘급하게’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종말에
귀를 기울이고 몸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못나고 부족하여 내세울 것 없어도,
우리는 지금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따르기 위하여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어찌하면 예수님을
더 잘 따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면,
‘무엇 때문에 나는 지금의 나로 여기에 머물러 있나?’
하는 질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따르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제자 됨을 영웅담으로
분칠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지금,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금,
나를 다시 한번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에 저당 잡혀 살아가는가 …….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신 분이시지,
우리에게 저만치 오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계십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14일 (화) [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1ㄴ-28
회당과 더러운 영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읽고 해석하는 공간,
그리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깨닫는 공간인 회당에
더러운 영에 짓눌린 이가 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현실의 당위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해서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다 보면,
낯선 이들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은 이유 없이 커져 갑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그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더럽다고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이유 없는 적대감에 희생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분리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서로를 멸망시킬 듯 날카롭다면
우리는 더러운 영에 취하여 사람다움을 잃어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사람다움의 회복이었고,
사람다움은 이 세상에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무한한 자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얽힌 실타래마냥 꼬인 이념의 논쟁들,
사상의 다툼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제 목소리 하나 내지도 못한 채
사람 꼴을 잃어 가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제 목소리를 내기 전에,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만의 ‘코드’에 합당한 이들만 모인 공간(회당)을,
낯선 ‘코드’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넓디넓은 공간으로 만들 줄 아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15일 (수) [녹]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9-39
몬의 장모가 누워 있던 집에서부터
온 갈릴래아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들은
모두 아픈 이들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십자가가 도시의
야경 속에 뒤엉켜 있는 오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들은 누굴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생각이 올곧으며,
일상을 성실함으로 꾸며 가는 이들을 볼 때,
참신앙인이라고 칭송합니다.
반면에 괜한 울분으로 세상을 비꼬듯 비판하며,
제 인생조차 남 탓하듯 허투루 대하는 이들의
‘삐딱함’을 보면서 신앙인의 모범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이들은
모두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복음 선포는,
아픈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아픈 것도 아쉬운 것도 슬픈 것도
고통스러운 것도 없는 이들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위험한 순간이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되뇌일 때가 아닐까 합니다.
영육으로 ‘결핍’을 느낄 때, 우리는 이웃에게,
하느님에게 손을 내밀 때가 있습니다.
사실 손을 내미는 것도 꽤 힘든 일이지요.
부끄럽기도 하고, 내가 이런 존재밖에 안 되나 싶어,
속상한 마음이 먼저라 손을 내밀기가 힘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되뇌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이들은 모두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잠시만 손을 내밀어 이웃을,
세상을 향하여 도와 달라 외쳐 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그 손을 맞잡을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자주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으려고 성당에 모이는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16일 (목)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40-45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와 예수님께서 주고받은 대화에는
하나 된 마음의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영웅 이야기로 서술되지 않습니다.
상대의 처지에 공감하고 화답하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사제에게 가라고 하신 이유도
서로의 마음이 소통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레위 3,14; 신명 24,8 참조).
나병이라는 병도 문제지만,
그 병 때문에 대립과 반목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완고함이 치유되기를 예수님께서는 바라십니다.
나병 환자의 병이 치유됨으로써
사람들의 완고함도 치유되기를 예수님께서는 바라고 계십니다.
나병 환자는
자신의 치유를 세상 사람에게 알립니다.
말을 하는 데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 말만을 내뱉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말을 건네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닫게 하고,
후자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이끕니다.
복음 선포는 후자의 말입니다.
복음 선포는 서로가
서로의 말을 하는 가운데 널리 퍼져 나가야 합니다.
말은 타인을 향하는 따뜻한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낸 말을 거침없이 쏟아 낸
수많은 순교자들 덕분에 오늘 우리의 신앙은
따뜻한 말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사랑, 희망, 용서, 화해 ……,
그 말들은 우리 교회가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탁월한 선물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17일 (금)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르자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복음묵상] 마르코 2,1-12
죄의 용서는 하느님께 미루어 놓고,
자기들끼리 단죄하기 바빴던 바리사이의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 사회의 갈등을 반성합니다.
우리 나라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 국가들 가운데 사회 통합 지수가
늘 꼴찌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서로 포용하고 화해하고 보듬는 데
너무 인색한 사회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예수님과 중풍 병자라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묵상은 중풍 병자를
들것에 뉘어 데리고 와서 지붕까지 뚫고
예수님과 만나게 한 네 사람에게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이름도 출신도 사상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죄인으로 낙인 찍힌 중풍 병자와 함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이를 치유의 사건으로 명확히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이 땅 위의 반목과 대립,
그리고 단죄와 갈등의 한가운데서 보여 주셨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난 용서 못 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 사람은 안 볼 거야.”와 같은
말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죄와 그 때문에 생긴 상처에
짓물러 터진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신앙인은 이를 이겨 내는 내적 힘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무작정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허덕이는 우리네 삶에 다른 이의
도움이 함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인내는 형제애 안에서 더욱 견고해집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위대한 영웅의 초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혼자 아픔을 감당하는 것과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용서 안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18일 (토)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2,13-17
부르고 응답하는 곳에 신앙이 있습니다.
신앙은 관계의 예술입니다.
각자의 신분과 계급, 능력과 의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신앙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앙은 ‘우연’ 속에서 ‘필연’을 만들어 가는 고된 작업입니다.
뜻하지 않은 기회에 누군가
나의 뜻과 다른 무엇을 제안할 때,
제 의지와 능력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황망함이 가득할 때, 신앙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레위가 그런 신앙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제 삶의 자리를 박차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신앙은 앞뒤 계산하지 않는 무모한 결단에서 시작합니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전적인 의탁이고,
그 의탁은 제 삶의 일정 부분을 내어놓고
또 다른 새것으로 제 삶을 꾸며 가는 상업적 거래가 아닌,
자신과 자기 자신의 결단에 대한 완전한 신뢰이기도 합니다.
의사에 빗대어 보면,
신앙의 전적인 의탁이 삶을
완성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픈 이가 의사에게 제 생명을 완전히 맡기는 것은,
그가 자신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간절히 하느님을 찾고 온전히 자신을 그분께 의탁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신앙 안에 하나가 되십니다.
신앙은 관계의 예술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예술 작품의 작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작품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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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이 시작 된지
한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성탄의 기쁨과
새해의 설레임에서 벗어나
일상에서의 삶에 정신이 없는 듯합니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보람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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