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충만한 나자렛의 성가정.
성가정, 예수님 모시고 하느님 뜻 실천하는 보금자리
신앙학교이자 사랑과 친교로 일치 이루는 가정교회
현 시대, 빈번한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등 심각하지만
나자렛 성가정 본받아 그리스도의 향기 서리게 해야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들의 마음을 다스립니다.
교회는 성탄 팔일 축제를 지내면서
한해의 마지막 주일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기립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이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사랑이 충만한 보금자리로 거듭나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가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고,
일치의 교회를 이루며,
사랑을 배우는 학교임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성가정은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감사하고,
사랑의 일치로 친교를 이루는 기쁨을 누리며,
기도하는 가운데 복음의 일꾼을 기르는 좋은 못자리입니다.
먼저 성가정은 예수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의 보금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분(「가톨릭 교회 교리서」 210항)이십니다.
헤로데는 빛나는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들로부터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들은 뒤 정적을 없애
권좌를 지키려고 베들레헴 일대에 두 살 이하의
모든 남아를 죽여 버리라는 사악한 명령(마태 2,16)을 내립니다.
하느님께서
성가정을 보호(마태 2,13.20)하십니다.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일러줍니다.
요셉은 밤길을 나섭니다. 산모인 마리아에게도
큰 고통과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집트는 유다 백성의
전통적인 피난처(1열왕 11,20; 예레 26,21)이고,
로마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안전한 곳입니다.
헤로데가 죽자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다시 나타나 이집트에서 불러냅니다.
헤로데는 죽기 전
다스리던 왕국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유다 지역은 헤로데처럼 잔인한 아
르켈라오스가 다스리는 곳이기에,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때 요셉은
꿈에 지시를 받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갈릴래아에 자리를 잡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삼십 년 동안 갈릴레아 호수 서쪽 24㎞ 떨어진
나자렛 고을에 사셨기에 ‘나자렛 예수님’으로 불립니다.
(마태 2,23; 판관 13,5; 16,17)
나자렛 성가정에는
성자와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십니다.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성덕의 샘이요,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가정의 어머니십니다.
동정녀의 순종과 마음에 간직한 희생정신이
사랑과 평화의 성전을 이룹니다.
의롭고 정결하신 성 요셉은 성자와 마리아를
충실히 보호하신 가정생활의 자랑이십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정입니다.
다음으로 성가정은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가정교회(「가톨릭 교회 교리서」 1655)입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자녀에게
주님을 섬기는 덕성(믿음, 소망, 사랑)을 넘어
부모에게 효도하는 책임(넷째 계명)을 일깨웁니다.
장성한 자녀들은 힘자라는 데까지 부모의 노후와 질병,
외로움과 곤궁함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선한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자녀의 죄를 용서받는 보상(집회 2,3.14)이 주어집니다.
제2독서(콜로 3,12-21)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가정 윤리를 일깨워줍니다.
주님께 선택된, 사랑받는 사람은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연민, 친절,
겸손, 온유, 인내로 대합니다.
불평할 일도 참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이 서로 용서합니다.
가족이 함께 주님께 올리는 찬미와 찬양이 아름답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시편 상해’에서
성가는 두 배의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친교의 끈입니다.
주님 사랑에 충실하면 가족도 내 몸처럼 사랑합니다.
끝으로 성가정은 참된 인성교육의
신앙학교(「가톨릭 교회 교리서」 2226)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함께
사랑이 충만한 가정생활을 하는 가운데
사랑과 환대를 바로 배울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과 친교,
겸손과 인내와 용서를 처음으로 체험하는 장소도 가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신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은 자녀는 올곧게 자라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오늘날 급속한 사회변화 속에서
가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바라지만
현실은 녹녹하지 못합니다.
혼인 생활에 실망과 고통, 증가하는 이혼율,
빈번한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무의탁 노인,
실직 가정, 미혼모의 발생과 낙태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가정은 생명과
사랑의 요람(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 212항)입니다.
모든 가정이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아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공경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새 복음화의 지름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며,
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눌 때 가족의 유대는 공고해집니다.
가정의 행복은 공동선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친교와 기도로 일치를 이루는 성가정은
사랑과 평화의 보금자리입니다.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가난하고 고통 받는 가정에도
사랑이 꽃피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서리게 빌어주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한주간 전례]
2019년12월 30일(월) [백]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복음묵상] 루카 2,36-40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세상의 유혹에 무릎 꿇지 않고
그분 사랑에 머무르기 위한 조건이라고 강조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것은 성탄을 믿음과 무관한 소비주의,
떠들썩한 소음과 소동에 치우친 시간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에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한나 예언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녀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다가
남편을 여의고 성전에 늘 머물면서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다가 자신의 소망을 이루었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항구하게
섬김으로써 보상을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왔을 때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은총도 받았습니다.
구세주를 만났고, 마리아가 하였던 것처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으며,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한나는 사제 계급에 속하지 않은 평범한 신자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똑똑하다는 이들과
교만한 이들과 자만에 빠진 이들에게는
강생의 신비를 감추셨지만,
목자들이나 동방 박사들처럼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이를 드러내셨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슈퍼맨도 아니시고
신화의 영웅도 아니시며,
이 세상에 태어난 다른 아이들처럼
가정 안에서 태어나 자라나셨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12월 31일 (화) [백]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복음묵상] 요한 1,1-18
오늘 독서는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시간은 인간 실존과 무관한 차원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날은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날과 해는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우리는 시간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시간을 낭비하거나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빈 포장지가 아니라,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고,
선과 악 그리고 사랑의 자유와
죄의 종살이가 끊임없이 싸우는 곳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적으로 나타날
거짓 예언자들의 존재를 떠올리면서 이런 싸움을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상기되는
“마지막 때”는 결정적인 싸움의 시간입니다.
신약에서 ‘마지막 때가 왔다.’는 표현은
역사가 끝나 가고 있음이 아니라 예수님과
그 복음을 위하여 우리 각자 해야 할 결정과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런 결정과 선택을 다음 기회로 미룰 수 없습니다.
요한은 거짓 예언자들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라고 강조합니다.
그자들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곧 예수님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주실 뿐 아니라
그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을 맞아들이고 함께해야 합니다.
이는 복음의 지혜를 얻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의 한 말씀,
곧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한 해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시간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당신 은총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그분 자신입니다.
올해 주님에게서 받은 모든 은총은
내년에 받을 은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20년 1월 1일 (수) [백]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세계 교회의 보편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2,16-21
말이 참 어렵습니다.
정제된 말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데
가끔 불쑥 튀어나오는 거친 말이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도 아프게 합니다.
신앙도 말로 이어져 온 역사 속에서
조금씩 다듬어져 온 것이지요. ‘내가 보았다, 내가 믿었다,
내가 깨달았다.’라고 수없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과
마리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앙을 가져다주는
말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자들은 보았고, 본 것을 외쳤고,
그들이 외치는 것은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목자들이 전해 주는 말은
사람들과 하느님을 연결합니다.
그런 목자들 곁에서 마리아께서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시지요.
침묵입니다.
단지 말이 없는 침묵이 아니라 말을 곱씹고,
느끼고, 깨닫는 침묵입니다.
목자는 말을 하고 마리아께서는 말을 묵상하십니다.
신앙은 말을 하고 듣는
순환적 관계 안에서 성장합니다.
서로 말하려는 가운데
서로 들으려는 노력이
균형을 맞출 때 신앙은 건강해집니다.
대개 배운 사람들의 못난 모습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남을 가르치려고 드는 자세입니다.
모르는 사람보다는 너무 알아서
듣지 못하는 사람이 참으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신앙의 말은 억눌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게끔 스스로 침묵으로 배려하는
겸손한 이들의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배우지 못하고 무능하고
죄인 취급받던 목자들의 외침으로 복음이 선포되었고,
마리아의 침묵으로 그 선포의 의미가
깊은 울림이 되었다는 사실을 복음은 집어냅니다.
한 해의 시작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이웃들이 어떻게 살고들 있는지 살펴보는
침묵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조차 꺼내기 힘든 거칠고
억눌린 삶을 살아가는 이들 안에 선포되는
하느님 복음의 의미를 깨달았으면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2일 (목) [백]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의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인 또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이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19-28
“나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는 자기 홍보(PR) 시대라며
스스로 자랑하거나 선전하는 데 여념이 없었지요.
내세울 만한 것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호기 어린 도전 앞에 딱히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이들은 괜한 자괴감과 열등감에 짓눌리기도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찾아온 이들을
가만히 보노라면 하나같이 괜찮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바리사이들 …….
그들은 유다 사회의 지도자들이었고,
싫든 좋든 그들의 힘과 명예 앞에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려야 하였지요.
그들이 세례자 요한과
나누었던 대화 역시 대단합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요한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예언자도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당시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아가 오기를,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알려 줄 엘리야, 그
예언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하여
그들이 바라던 대답을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우리에게 메시아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
스스로 자기가 갈망하는 것에
집착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이의 겸손함을 통하여 나타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이러한 겸손을 위한 예식입니다.
죄를 씻는 것은, 나만 옳고,
나만 잘났다는 생각으로부터 해방입니다.
그리고 타인을, 사회를 고귀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간직하는 일입니다.
“나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는 세상,
바로 그 세상에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를 낮추시어 겸손하신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3일 (금) [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은
구약 시대부터 더듬어 보아야 할,
꽤나 무겁고 중요한 표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탈출 12장 참조),
어린양의 피로 하느님께 ‘생명’을 보증받았습니다.
피가 생명일 수 있는 것은, 어린양의 희생 덕분이었고,
그 희생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는
여정의 어려움에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은
이사야서 53장에서도 나타납니다.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에 빗대어 묘사됩니다.
죽어 가면서도 침묵하는 그 침묵은,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진
주님의 종의 희생을 상징하는 격조 있는 표현입니다.
요한은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어린양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깁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을 살리는 어린양의 겸손과 희생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자, 예수님의 삶 자체였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이러한 희생을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낮은 자리에 먼저 찾아드는,
그래서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사랑입니다.
더불어 살기에는
너무 심한 경쟁에 내몰린 오늘,
우리의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사랑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분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 묵묵히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걸어오시는데, 우
리는 그저 하늘만 쳐다보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2020년 1월 4일 (토) [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35-42
예수님께 모여드는 사람들의
바람과 갈망은 다양하다 못하여 어지럽습니다.
진학, 사업, 건강, 성공, 행복 등은 제쳐 놓더라도
제 신념에 대한 확증이나 사람끼리 부딪쳐
상처 입은 영혼의 처절한 외침까지,
예수님을 찾는 이들의 가슴은 그렇게도 답답하고 먹먹한가 봅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요한의 두 제자가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였을까요?
메시아? 그럴 테지요.
다만 그 메시아가 각자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보장해 줄 메시아일 수도 있고,
제 신념이나 가치관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줄
메시아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한마디만 건네십니다.
“와서 보아라.” 중요한 것은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저마다 다른 뜻과 바람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것을 서로 다른 것으로 놓아둘 수 있는 일,
쉽지 않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는 길에 필수적인 과업입니다.
신자로서 잘 살아야 된다는 사명감 아래,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덕목들을
순수한 신앙의 가치들과 뒤섞어 놓는 일이 많습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반드시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가치는 인간의 모든 것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무모하지만 용기를 내어
결단해야만 하는 끝없는 회개로 초대된 사람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아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축하는 성탄시기 입니다.
기쁨과 행복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니
어느새 올해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잘한 것, 이루지 못한 것, 보람찬 것 등
아픔과 기쁨, 슬픔과 행복의 삶속에서
새로운 새해를 희망으로 맞이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