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12월 15일 (일) [자]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제1독서(이사 35,1-6ㄴ.10)
제2독서(야고 5,7-10)
복음(마태 11,2-11)
지행합일(知行合一)
지행합일(知行合一).
앎과 실천이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번역된다.
그런데 명나라 때 왕양명은
‘앎과 실천은 원래부터 일치돼 있다’라고 풀이한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앎과 실천은 원래부터 하나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은 ‘앎’은
참다운 앎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때 참다운 앎을
진지(眞知)라고도 하고
왕양명은 그것을 양지(良知)라고도 불렀다.
호랑이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과
멧돼지의 갈비뼈를 부서뜨릴 만큼 강한
이빨을 아무리 설명해 줘도
그는 그저 신기해 할 뿐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깊숙한 산중에서 호랑이를
한 번이라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이 오싹해지며
사지가 부들부들 떨릴 것이다.
진정으로 호랑이를 아는 사람이다.
행동이 자연스럽게 함께한다.
문제는 윤리적인 앎은
우리들의 체험적인 앎처럼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용서하지 못하고,
나눠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누지 못한다.
양명의 관점에 의하면 결국 우리는
용서와 나눔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명의 답은 간단하다.
그럼에도 용서하고 나누라. 완전하지 않은 인간은
이미 해야 할 것을 알고 있지만 습관이나
나약함 때문에 행동을 미루거나
마음의 흡족함을 이유로 망설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천하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본래적 앎을 증거 한다.
왕양명이 지행합일을 말한 것은
결국 우리의 실천이 많은 지식이나
완벽한 앎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당시 주자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앎이 이뤄진 이후에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종신토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양명은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윤리적인 것에 있어서
고도로 예민한 양지(良知)가 있으므로
그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나는 선한 일을 할 자격이 되는지,
혹은 내 마음이 선한 일을 하는 데
충분히 동의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여기에는 많은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모든 조건들이 외적으로 다 갖춰진 다음에 실천하는 것이
완벽한 결과를 얻는다는 생각은
한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을 만난다.
감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다.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줬으며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
(마르 1,7; 루카 3,16)이라고 고백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오늘 그는 제자들을 시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 11,3)라고 묻게 한다.
요한 세례자는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확신을 뒷받침해 줄 만한 무엇인가를
더 발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마태 11,4)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
려주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말씀을
다시 들려주셨을 뿐이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마태 11,5)
그들이 ‘보고 들을’ 만한,
그래서 그들의 확신을 뒷받침해 줄 만한
새로운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요한의 제자들뿐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진 것을 이미 봤다.
예수님께서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에게 보여준 새로운 것이란 결국
예수님의 흔들림 없는 음성과
확신에 찬 신적인 인간의 모습뿐이었다.
말과 행위, 앎과 실천이 하나 된 하느님의 얼굴이다.
요한 세례자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봤다는 데 있었지만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이보다도
작은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확신을 구하려는 의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하늘나라의 존재와
인간이 구분되는 분기점이다.
여전히 ‘알아야’ 더 잘 믿고 행할 수 있다는
나약한 인간의 두려움이 그것이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면서
동시에 자선 주일이다.
우리의 나약함은 자선을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
혹은 나를 드러내기 위해 자선을 하는 것은 아닌가,
또는 나의 이 자선이 일시적인
동정심은 아닌가 등의 질문이 그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이유로 나눔과 베풂을 유보한다.
차라리 그것이 자신에게 더 솔직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이유들이 충족될 때를 기다린다면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평생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핑계 삼을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믿음에 찬 실천을 시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이사 35,1)
물기 하나 없는 광야와
메마른 땅은 스스로 기뻐할 수 없으며
사막은 스스로 꽃을 피울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마음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광야이며 메마른 땅이며 사막이다.
기뻐하거나 꽃을 피울 만한 자격이나
능력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우선 기뻐하고 꽃을 피우라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행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의 신앙은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고,
이 기다림은 메마른 우리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작은 실천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천과 앎이 절대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행이 지속되지 못할 수도,
그 이후에 다른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믿고, 희망해 실천하라.
기쁨과 꽃을 피우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대림(待臨).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란
오늘 제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척박함에 꽃을 피우는 그 날을 기다리는 것,
그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아닐까.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8)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한주간 전례]
2019년12월 16일(월) [자]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1,23-27
오늘 독서에서는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예언자인 이방인 점쟁이,
발라암의 신탁을 들려줍니다.
발라암은 모압의 임금 발락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메시아의 축복을 들려줍니다.
주님의 영에 이끌려,
야곱에서 나온 임금이 이스라엘과
많은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교회 전통은 전체적인 의미에서,
이 예언이 기다리던
메시아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복음에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는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신 분으로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정통 교리를 지키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자신의 불신 때문에,
그리고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하느님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늘에서 오는 신비에 겸손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권한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비난을 일삼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권한을 조용히 부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인 그들은 거짓 예언자들과
참예언자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였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12월 17일 (화) [자]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17
오늘 독서는
‘야곱의 축복’ 가운데 일부입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인간이 신뢰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현존으로 나타내는
생명의 연속성을 표현합니다.
축복해 주시는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신뢰하는 이들을 당신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야곱, 곧 이스라엘은 죽기 전에 아들들을 불러 축복하고,
메시아가 올 유다의 미래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유다는 통치와 왕권이 맡겨진 지파로 제시됩니다.
“유다는 어린 사자. ……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유다는 바로 메시아,
다윗의 자손이 태어날 지파입니다.
복음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시고
시간의 충만함 속에 보내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놀라운 ‘충만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던 시기에
평범한 고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법적 아버지인 요셉은 다윗 가문에 속하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매우 평범한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는 분이시고,
모두가 하느님 계획의 완성을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였을 때 당신 계획을 이루십니다.
족보에서는 어떤 우연이나 운명의 결실이 아니라,
구원사의 완성을 남자들과 여자들을 통하여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드러내시고 바라시는
역사의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우리 구원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역사를 읽고 이해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역사 안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12월 18일 (수) [자]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18-24
주님께서는 양들을 흩어 버리고
당신도 저버린 목자들을 엄하게 질책하신 다음
당신께서 직접 내려오시어
양들을 다시 모아들이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전에 살던 곳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레 23,1-4 참조).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날이 온다! …….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주님께서는 성탄에 땅을 진정으로 다스리고
정의와 공정을 이룰 “싹”을 세상에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한 아이로, 참
으로 외부의 힘이나
인간의 현세적 특성에 좌우되지 않는
“싹”으로 나타납니다.
이 싹은 무한한 사랑에 힘을 두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주님을 하늘에서 내려오시게 하고,
당시의 거리와 광장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레미야가 행한 예언의 완성을 봅니다.
오래전부터 예언된 탄생 사건은
요셉의 개인적이고
매우 고통스러운 인생과 함께합니다.
하느님의 큰 선물은 일반적으로 큰 시련이 따릅니다.
요셉은 희생을 감수하며
자신과 모든 이를 위한 특별한 은총,
곧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은총을 받습니다.
동시에 내적 기쁨과
완전한 정절을 통하여 마리아와
영적으로 결합하는 삶을 준비합니다.
요셉의 강한 마음과 부드러움에 탄복합니다.
의로운 사람인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면
그녀가 수치를 겪게 될 것이므로,
남몰래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남모르게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요셉의 강한 마음의 표지이지만
이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의 부드러움입니다.
요셉은 천사가 전하는 소식에
갇혀 있지 않고 희생할 준비를 하며,
하느님 말씀에 열려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요셉이 열려 있는 사람임을 알고
그에게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을 전하면서
하느님의 큰 약속을 드러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12월 19일 (목) [자]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5-25
오늘 독서에서는
삼손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기에
남편과 함께 하느님의 개입을 간청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원할 아이의 탄생을 전합니다.
삼손은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된 사람이므로
관련법에(민수 6장 참조) 따라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그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는 먼저 관련 규정을 지키고
이어서 아들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이 부모의 청원은 받아들여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활동을 통하여
신앙과 연관된 희망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의인들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삶의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느님께서
그 시련을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였지만,
그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어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때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하고 말합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는
천사의 말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하고 말합니다.
희망이 사라진 믿음이나 믿음 없는
희망이 사라진 즈카르야는 새 시련을 맞이합니다.
말씀이 실현될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는 시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라진 희망을 돌려주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12월 20일 (금) [자] 대림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26-38
오늘 독서에서는
강생의 핵심, 곧 하느님의 무상 계획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무상 계획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반항자들에게 취하시는 계획도 다룹니다.
주님께서 아하즈 임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하시지만,
그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변명하면서 청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악한 태도가 드러나는 그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표징을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계획은
구원의 핵심 내용을 드러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활동이며
모든 인간 행위보다 먼저 이루어집니다.
이런 측면은 천사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하고
마리아를 부르는 오늘 복음에도 있습니다.
이 표현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녀를 은총으로 채워 주시면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위하여
어머니를 준비하시는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그 계획은 온전히 하느님의 일이고
마리아는 당신의 종으로 소개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만하지 않습니다.
표징을 청하지 않겠다는 아하즈처럼 대꾸하지 않고,
겸손하게 듣고 어떤 개인적인 변명도 하지 않으며
그저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입니다.
성탄으로 시작되는 기쁨과 희망을 받아들이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의 선물로
오신다는 점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12월 21일 (토) [자]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39-45
오늘 독서에서는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는 연인을
생각하는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 연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밖으로 나가
봄의 아름다움을 함께 즐기자고 청합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마치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라는 권고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계획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에 달려가십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
지금 태어나시려는 당신을 맞이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의 요청입니다.
복음에서 엘리사벳과
태중에 있는 아기 요한은
메시아의 어머니께서 방문하셨을 때 기뻐합니다.
두 여인과 태중에 있는 두 아이의 기쁜 만남!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기쁜 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외친 큰 소리,
곧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를 반복합니다.
이 소리는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나자렛 예수님께 보낸 찬사에서 그 울림을 찾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7-28).
마리아는 믿음과
말씀의 행복을 받아들인 첫 여인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나중에 파스카 발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토마스 사도에게 전하실 믿음의 행복이
이 말씀 안에 들어 있고,
두 여인의 기쁜 마음에서 그 정점에 도달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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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대림초에 촛불 3개가 켜집니다.
대림시기의 반이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아기의 모습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가정의 화목도 기도해 봅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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