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2일 (일) [(백)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제1독서(사도 13,14.43-52)
제2독서(묵시 7,9.14ㄴ-17)
복음(요한 10,27-30)
잘 안다는 것, 주저 없이 알아듣는다는 것
"사랑은 관계를 맺는 행위라기보다 알아보는 행위이다."
프랑스의 신경정신의학자이며 비교행동학자인
보리스 시륄니크가 정의한 내용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알아보게 하고
온전히 알게 하며 신뢰하고 따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소 주일이며
'착한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부활 4주간의 본문들은,
서로를 알고 그 목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들으며
그 어떤 난관 중에도 그를 믿고 따르는 '목자와 양떼'에 대하여 전합니다.
특별히 복음의 본문은 예수님과 그분의 양떼 사이에 형성된
이 관계가 하느님에 의해 시작되고
그 마지막까지 주도됨을 알려줍니다.
인간은 낯섦에 대하여 늘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타자적 존재를 그 어떤 두려움 없이 온전히 믿고
그 목소리를 주저 없이 알아들으며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관계는
하느님만이 허락하시고 계획하시며 가꾸어 가시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께서 자신의 양떼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성전봉헌 축제(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혁명군이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를 격퇴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탈환하여
정화하고 봉헌한 사건 기념)를 그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요한 10,22 참조)
유다인들의 큰 축제 중 하나인 이 시기에
군중들은 예수님이 오셔야 할 메시아인지를 질문합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10,24)
이스라엘의 자부심이었던 다윗의 영광과
마카베오의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성공을 전제로, 예수님도 그렇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위업을
이룩해주실 수 있는 분인지를 노골적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목자가 양떼를 이끄는 듯 한 헌신과 사랑이
당신의 사명이며 영광임을 강조하여 알려 주십니다.
■ 양들을 잘 아는 목자
목자와 양떼의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유비'(類比)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이고 그분의 것이기에
그분을 따라야 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의 소리를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예수님의 양들은 그분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듣고
또한 목자도 양들의 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이러한 상호성은 언제나 목자와 양들이 함께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난히도
'안다'라는 동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스어 '기노스코'에 해당되는 이 단어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알고 배우는 인지적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가 갖고 있는 본질을 찾아내어 섬세하게 알아주고
이를 실현시키는 헌신적인 행위, 돌봄, 확신… 등
사랑이 주는 모든 정서를 내포합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내용들도 이
'앎'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는데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28절)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은 죽음이나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그들을 살리는 것이며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여 안전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이유는
자기 목숨을 당신의 양들을 위해 내어놓으셨고
그 사랑으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 사랑의 중요한 단서 하나가 제시됩니다.
이 관계가 여타의 인간관계와 명백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그분에 의해 계획되며 인도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29절)라고
이 관계의 근원을 분명히 표명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하느님에 의해 주도된 관계는
절대적이고 견고하며 놀라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
반대로, 제1독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거주하던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명망 있는 인사들을 안식일에 초대하여
회당에서 연설을 듣는 관습이 있었는데
본문은 이 도시의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말을 듣기 위하여
"거의 다 모여 들었다"(사도 13,44)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사도들의 말을 듣고자 모여드는 것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44절) 합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46절) 판단한 것이라고 보고
다른 민족들에게 말씀을 전하겠다는 담대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자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됩니다.(48절)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형성되는 것입니다.
■ 어린양이시며 목자이신 분
제2독서인 묵시록의 내용도
"하느님의 백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약을 연상시키는데(창세 22,17 참조)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 7,9)를 형성하고 있고,
국가나 민족의 구별 없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온 이들로서 광대한 보편성을 가집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국한되던 구원의 범주가
이제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 새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한 이들인데(14절)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들을 죄에서 벗어나
깨끗한 상태로 건너가게 하였음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희생과 봉헌은
예수님을 그들의 목자로 세우게 하는 결정적 사건이 되어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17절)십니다.
"어린양"은 이제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서슬 시퍼런 분노와
목숨을 건 투쟁으로 일궈낸 안정이라 하더라도
그 정치적 현실이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지 못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의 축재와 성공을 통해 살기에 가장 편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이 비인간화와 결핍의 허기를 무력화시키지 못함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정치·경제적으로 구원할 제왕적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 어떤 영화나 화려함도 인간이 구현해야 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행복과 충만,
자유와 해방을 주지 못함을 깨달으면서
진정한 구원의 실체를 묻기 시작합니다.
그 답은 존재를 바쳐 믿고 보호하며 이끌어주는 목자적 메시아의 등장이었습니다.
부질없는 저항이나
집요한 탐욕에 대한 추구는 현재를 더욱 불안하고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건네주시는 주변의 작은 사랑과 우정을 알아보고
그 빛이 인도하는 복음을 향해 걸어갈 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누릴 온전한 기쁨과 충만은 완성됩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19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4주간 월요일][복음묵상] 요한 610,1-10
양을 이끌고 있다고 다 목자는 아닙니다.
도둑이며 강도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목자를 따르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우리가 믿던 목자가 도둑이며 강도임을 알게 된다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따라가는 목소리가 하느님께 인정받은
참목자의 목소리인지 도둑의 목소리인지 이 땅에서부터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목자와 도둑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먼저 도둑은 양 우리의 '열쇠'를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갑니다.
그러나 진정한 목자는 양 우리의 열쇠를 지닙니다.
그 우리의 주인에게 인정받았기에 열쇠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로서
양들을 데리고 들어가시는 '양 우리'는 바로 '하느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 나라의 '문'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문'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죄인인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당신 열쇠를 주셨습니다(마태 16,19 참조).
'하느님 나라의 열쇠'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53항 참조).
하느님 나라에서 죄 때문에 쫓겨났다면,
그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곧 하느님 나라의 열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그 위에 세워진 교회를 당신과 같은 목자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니 '참목자의 증거인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으면서도
자신들이 목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교파들을 따라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마티아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메우려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이다(사도 1,21-26 참조).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이로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루카 10,1-2 참조)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예루살렘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복음묵상] 요한 15,9-17
부자가 삼대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재산을 모은 이의 재주가 삼 대 이상 전수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께 받은 유산을
삼 대가 아니라 삼백 대가 지나도록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어 오는 유산 가운데 하나가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그리고 그 유산은 사람이 아니라 직무를 통하여 계승됩니다.
누군가 한 회사의 사장으로 뽑혔다면
사장의 권한까지 부여받게 됩니다.
사장은 직무지만 그 직무와 권한이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직무를 맡았으면 권한도 받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사도의 직무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았습니다(요한 20,22-23 참조).
따라서 사도라는 직무와
이에 따라 주어지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별개가 아닙니다.
새로운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뽑힌 마티아는
다른 사도들이 행하는 권한을 똑같이 받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과 똑같은 권한을 수행하던 유다를 대신하여
똑같은 직무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권한과 직무는 하나입니다.
직무가 사라지면 권한도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실 때
'이 땅'(마태 16,19 참조)에서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직무를 새롭게 수행할 이를 뽑는 일을 멈추게 된다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이 열쇠의 특별 권한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마티아 사도는
'교회의 직무 수행'을 통하여 계속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큰 상징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2,44-5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파견되셨고,
당신이 빛이심을 믿는 이들은 구원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으로 세상에 오신 분을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이유는,
밤에 오징어들이 오징어잡이 배의 밝은 빛을 보고 올라와 잡히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는 마치 어두운 바다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고 위로 올라오는 오징어들처럼
필사적으로 부모에게서 오는 사랑을 찾습니다.
생존을 위한 이유도 있지만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사람이라도 짐승에게 길러지면 짐승이 됩니다.
부모가 누구이든 그 사랑을 믿어 버리는 자녀는
사랑을 주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부모에게서 오는 사랑이 어린 아이의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신 아버지를 증언하시려고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빛을 통하여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집에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밝혀 주시는 빛이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4주간 목요일][복음묵상] 요한 13,16-20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자 자기의 생각이나 뜻을 버려야만 합니다.
나의 생각이 섞이면 나를 보낸 이의 뜻이 흐려집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라고 하십니다.
또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그분께서 어떤 말씀과 행동을 하시려고 하는지
주의 깊게 듣고 관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증언해야 할 이들 가운데
당신을 배신할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그때나 지금이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고 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이들은 말씀을 증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그런 자리를 꿰차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를 증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발꿈치를 치켜들며 대든 사람이 누구라고 밝히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힘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파견된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선물 포장지가 조금 상했다고
그 안에 든 선물까지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이따금 신뢰할 수 없지만 성령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교회를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이는 곳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4,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가신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십자가의 순종으로 얻어 내셔야만 했던 자리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하시며 그들을 안심시키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셔야 하는 일만을 생각하며 두려워합니다.
그 죽음이 자신들에게도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빠가 일을 나가는데 아기가 떨어지기 싫어
아빠에게 울며 매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부모의 십자가는
자녀의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기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 부모와 떨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십자가가 커다란 고통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자 되세요.", "꽃길만 걸으세요.",
"좋은 일만 있으세요."라고 인사하며
이 세상에서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고통 없는 출산이 없듯, 성숙한 신앙인은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음을 압니다.
더 큰 영광은 더 큰 십자가에서 옵니다.
남편은 아내가
고통을 당할 것임을 알면서도 아기를 출산하기를 원합니다.
그 고통을 넘지 않으면 두 사람이 함께 누릴
새 생명이 탄생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시라면
그분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걸어야만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복음묵상] 요한 14,7-14
돈을 열심히 벌어다 주는 남편에게
아내가 "이젠 돈 말고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세요."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남편들은 황당해 할 것입니다.
그들은 피땀이 서린 돈이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편이 벌어 온 돈이 사랑을 모두 표현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사랑이 담긴 선물'로 표현됩니다.
선물을 보면서 그 안에 담긴 사랑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도 이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물이십니다.
아버지의 피땀이 서린 사랑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면 아버지를 뵌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면 아버지의 사랑을 본 것입니다.
선물을 믿어야 선물을 주신 분을 믿게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여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필립보와 같은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신 선물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선물은 바로 당신께서
피 흘리심으로 탄생시키시고 세상에 세우신 '교회'입니다.
교회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내시는 당신 사랑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보면서도 예수님을 보여 달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보면서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유다인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배척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다른 민족들에게 가겠다고 합니다.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선물을 주시는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선물을 먼저 믿어야
그것을 주시는 분을 받아들이고 주시는 분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교회를 받아들여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삼위일체 하느님의 계시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3~248항)
성령을 통해 계시되는 성부와 성자
'성부' 하느님·'성자' 예수님 통해 세상에 '성령'의 선물 주어져
성령으로 하느님 자녀된 우리 받은 사랑 깨닫고 증거하게 돼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사랑과 선물과의 관계,
사랑과 능력과의 관계가 잘 표현된 소설입니다.
두 가난한 부부가 성탄절이 되자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시계를 팔아 아내를 위한 예쁜 빗을 삽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팔아 그 돈으로 시곗줄을 삽니다.
상대에게 필요 없는 선물이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선물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표현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의 선물은 반드시 선물하는 사람의 능력 한계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선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선물합니다.
자녀가 물에 빠졌다면 부모는 자녀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입니다.
조금 주면 조금 사랑하는 것이고, 생명을 주면 완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를 통해 받으신 선물인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43항 참조)
성령은 본래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245항 참조)
아드님을 통하여도 세상에 오십니다.(246항 참조)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요한 16,13)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요한 3,5 참조)
성령을 통하여야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8,15; 갈라 4,6 참조)
성령은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 수준까지 올려주는 능력을 지니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인간은 이전의 모든 죄에서 벗어나(마태 3,11; 루카 3,16 참조)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루카 1,35 참조) 성령께서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니
성령 자체가 하느님이십니다.(245항 참조)
성령을 통하여 인간이 하느님이 되면
성령께서 하느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힘이 되시기도 하십니다.(마르 13,11 참조)
선물을 통하여 우리는 주는 이의 사랑의 정도,
주는 이의 능력의 한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성령을 통하여도 우리는 주시는 분,
즉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과 능력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능력은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들 정도로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을 주시는 아버지와 아드님도 전지전능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전지전능하심을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선물하시니 하느님은 사랑이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처럼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처럼 우리도 완전해지는 길입니다.(마태 5,48 참조)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이시기에 하느님께서는
청하는 이에게 반드시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루카 11,13 참조)
그러나 선물은 또한 받는 이의 능력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아기에게 자동차를 선물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성령님을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세상 것'이란 포장지에 싸서 선물하십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에도
학교에 갈 형편이 안 되어 어머니와 구걸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는 성당을 좋아하여
창문 밖으로 들려오는 주일학교 교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셔서 '파라클리토'(보호자, 위로자 : 243항 참조)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내용이입니다.
아이는 화가 나 하늘에 대고
"왜 저에겐 그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는 거죠?"라고 따지듯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너의 어머니를 창조하고
너의 어머니에게 너를 사랑하는 마음도 넣어주었단다."
사랑하는 마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갈라 5,22 참조)
그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부모를 통해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나에게 오는 것들이 하느님의 선물처럼 느껴지지 않더라도
그것은 포장지만 보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그 안에 하느님의 성령이 담겨있습니다.
하느님은 청하는 이에게 당신 성령을 반드시 선물하십니다.(루카 11,13 참조)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수원가톨릭대 교수, 가톨릭신문)-
※ 지금까지 연재된 "생활과 함께 하는 교리"는
메인페이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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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도 어느듯
중반에 접어 들었습니다.
성모성월 5월에
성모님의 은총이
교우님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