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총♡공간 ▒▒ /∞·매일미사♡

[한주간 소식] 성지주일로 성주간이 있는 주간입니다.

Berardus 2019. 4. 14. 18:55



    성지주일로 성주간이 있는 주간입니다. 사순시기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준비하신 모든 분께 주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합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4월 14일 (일) [(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이사 50,4-7) 제2독서(필리 2,6-11) 복음(루카 22,14-23,56) 핏발선 저항도 무력한 순응도 아닌… 일반적으로 인간은 '고통'이라는 현실 앞에서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고 합니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는 아무리 위험하고 불안한 여정을 걸어야 한다 하더라도 투쟁하거나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 투쟁이 결코 희망을 가져다주는 온전한 혁명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안전한 종속의 길을 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주간으로 들어서는 사순의 마지막 주일에 봉독되는 본문들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선택과는 다른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극도의 고통과 비참 속에서 돌아가셨지만 그것은 결코 불의에 대한 저항도, 종교적 심성의 발로인 비폭력 순응도 아닌 매우 독특한 속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체념으로 말미암은 수동성이나, 좌절과 절망에 항복하는 무기력과는 구별되는 당당함이 있었고, 동시에 민중의 분노를 가열시켜 체제 전복을 부추기고 사회를 광폭에 휘둘리게 하는 선동성을 품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항도 순응도 아니었던 예수님의 태도는,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완전한 사랑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발성'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발성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관계에 들어선 이들 사이에는 그 어떤 의무나 규칙의 강요 없이도 저절로 파고드는 극적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향한 충직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 어떤 힘에도 훼손되거나 파괴되지 않으시고, 오로지 자발적인 헌신과 내어줌, 신뢰와 신념으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십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 사건은 모든 공관복음서가 다루고 있는 내용인데, 저자가 속한 공동체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달리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루카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잔혹한 고문이나 치욕적 순간들에 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자제되어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상 죽음을 결코 비극적 사건이 아닌,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이루는 여정이며 이미 예고된 필수적 사건(루카 24,6.44.46 참조)으로 보려는 저자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특별히 루카복음은 '마지막 만찬' 장면에, 제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한 논쟁을 삽입해 두고 있는데(23,24) 이는 이어지는 내용, 즉 타인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낮아지는 자세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수난을 염두에 둔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실존적 변화는 헌신과 내어줌을 통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고 가장 낮아지는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수난은 그 길이 곧 구원이며 영광이라는 역설을 명확히 알려줍니다. 인간의 실존적 변화는 훌륭한 교육이나 지성, 우아한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헌신이나 내어줌,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체험하고 목격했을 때에만 제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고학력자들이 넘쳐나고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회의 질적 향상과 직결되지 않음은 작금의 우리 사회를 관찰할 때 쉽게 확인됩니다. 성공과 행복을 위해 혹독하게 교육받고 세상이 만들어낸 가치에 적합한 존재로 제조되는 숨 막히는 과정을 무던히도 감수하지만, 그 교육의 결과로 난무하는 것은 상대적 빈곤과 공허한 결핍, 추태와 위선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나를 위한 누군가의 헌신과 내어줌, 항구한 사랑과 희생을 직접 목격하고 배우며 그 경이로움에 온전히 동화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만이 세상을 개혁하고 바꾸는 기본 규칙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몸소 증거 하셨는데, 우리를 정치적 능력이나 군사적 힘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시어 세상에 오시고 온전히 내어주심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서는 특별하게,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십자가상의 두 강도의 대화를 통해 대별시킵니다. 두 사람의 상반된 행위는 십자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전반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한 죄수는 그분을 여전히 모독하고 비난하며 하느님과 운명을 저주하지만, 다른 죄수는 그러한 상대방을 꾸짖고 예수님의 무죄함과 의로움을 선언합니다.(39-40절) 그리고 이러한 지고한 사랑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임을 전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41-42절) 이 강도의 고백은, 수난과 죽음을 선택하셔야 했던 예수님의 의도가 실현되는 중대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겸손과 진리, 인간을 위한 진심 어린 사랑을 목격하면서 우리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고 마침내 구원되기를 간청하는 것, 이 진정어린 관계야말로 생명을 바쳐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구원사업이 목적하고 추구한 결과인 것입니다. ■ 수난 받는 주님의 종과 바오로가 증언한 예수님의 고난 제1독서의 이사야서 본문 역시 모든 수난과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힘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임을 알려줍니다.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격려할 줄 알게…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듣게 하신다."(이사 50,4) 특별히 주님의 종은 모욕하는 자들의 폭력에도 물러서지 않는데(5-6절)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7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일반 영웅들이 남겼던 역사적 서사와는 분명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 이들의 죄를 밝힘으로써 누가 진정한 의인이고 죄인인지를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무죄함을 항변하거나 밝히려고 하지 않으셨으며, 그 수난과 죽음이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인지를 과시하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을 진정한 구원의 길로 인정하시어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십니다.(제2독서, 필리 2,9) 스스로를 낮추신 예수님의 방식은 하느님에 의해 드높여지고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고통을 종교로 승화한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마르크스의 지적대로 '종교가 아편'이 되는 순간을 허용하는 말인 듯하여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그분의 고통이 우리의 불행보다 더 처참한 것이었기에 상대적 위안을 주기 위한 것도, 그분처럼 잘 참으면 천당에 가게 된다는 편의적 발상도 아니었습니다. 정해진 제도와 규범 안에 얌전히 구속되어 있을 때 우리의 모든 고통은 천국을 위한 보험처럼 안전성을 보장해준다는 프레임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는 것은 도덕과 금기의 이름으로 감시와 위선만을 더욱 양산시키는 구조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가장 낮고 위험하며 고 독한 곳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완성하신 구원의 본질을 축소시키고 왜곡할 여지를 갖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루며 무엇을 소유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충만히 채우고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축복을 온전히 누릴 때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런 구원을 이루는 힘은 누군가의 정직한 내어줌과 사랑에 근거합니다. 메시아의 수난은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계획되고 실현된 위대한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19년 4월 15일 (월) [(자) 성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2,1-11 성주간 첫 사흘의 독서는 파스카 신비의 도입으로 '주님의 종'의 처음 세 노래에서 뽑은 구절을 봉독합니다. 이 신비로운 표상은 한 개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냅니다. 교회 전통은 '주님의 종'의 노래들을 줄곧 메시아적이고 그리스도론적 의미로 봉독해 왔습니다. 그 첫째 노래에서 예언자는 외치지도 않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성실하게 공정을 펼치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자비롭고 온화한 종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종, 곧 하느님께서 당신 영으로 기름을 발라 주시고 당신 백성인 교회를 위하여 계약을 맺으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민족들의 빛이 되시고,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시며,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매우 사랑하신, 한 가정집에서 쉬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곳에는 그분 친구들과,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도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미워하는 중에도 이런 진솔한 우정은 예수님께 큰 위로를 줍니다. 라자로의 부활은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기에 유다인들은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파스카 축제 엿새 전, 예수님께서 저녁을 드실 때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이런 행위가 쓸데없는 낭비라며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비난에 개의치 않으시고 마리아를 옹호하시며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4월 16일 (화) [(자) 성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3,21ㄴ-33.36-38 2014년 오늘 일어났던 세월호 사건과 그 희생자들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 뽑은 오늘 독서는 모태에서부터 받은 종의 사명, 곧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끌어 모으며, 하느님의 구원이 땅끝 까지 다다르도록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명을 들려줍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실 보편적인 구원의 사명입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는 오늘 복음은, 파스카 만찬 예식의 준비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뒤, 산란한 마음을 드러내시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리둥절할 때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베드로의 지시에 따라 누구를 두고 하신 말씀인지 그분께 묻습니다.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주님께서 빵을 적신 뒤 그것을 들어 시몬의 아들 유다 이스카리옷에게 주셨고,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갑니다. 유다에게 빵을 주신 예수님의 행위는 본디 배려의 행위, 곧 유다가 주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제대로 수행하고 그의 야심과 원한으로 깨진 우정을 회복하라는 초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유다가 결정적으로 거부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유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는 밤입니다. 배신자는 빛이 드러나지 않는 어둠의 본보기입니다. 유다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의 활동은 사악했습니다. 주님께서 예고하신 밤(요한 9,4 참조),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루카 22,53 참조)가 다가왔습니다. 이때 땅을 덮은 기나긴 밤은 주님께서 부활하시는 날, 이른 아침 여명으로 다가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4월 17일 (수) [(자) 성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6,14-25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속한 제1독서에서, 종은 신의와 공정을 위한 노력의 결실인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종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을 미리 보여 줍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이는 박해받는 의인이 겪은 고통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적대자들의 계획을 도와줄 유다 이스카리옷의 사악한 표상을 강조합니다. 우정을 깬 분위기, 제자들과 함께하는 주님의 파스카 만찬의 분위기에서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있는 곳을 아는 자는 속히 그들에게 알리라고 명합니다. 유다는 이 말을 듣고 수석 사제들과 예수님의 목숨을 은돈 서른 닢으로 흥정합니다. 이는 종의 몸값입니다(탈출 21,32 참조). 자제할 수 없는 유다의 탐욕은 슬픈 비극을 맞이합니다. 만찬 때 예수님께서 배신자의 은밀한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를 준비하시는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회개할 수 있는 우정의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스승의 말씀에 당황한 제자들은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습니다. 유다도 같은 질문을 합니다. 잃어버린 제자를 끝까지 되찾으려고 예수님께서는 긍정적으로 대답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4월 18일 (목) [(백) 주님 만찬 성목요일] 교회는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다.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드러내셨다. 제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이 만찬을 미사로 재현한다. [복음묵상] 요한 13,1-15 오늘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생활에서 중요한 날입니다. 전례주년에서 단 한 번 있는 거룩한 목요일입니다. 성찬례가 늘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회상한다면, 오늘은 지금까지보다 그 이상으로 특별한 상황에 깨어 있는 믿음의 효과인 의식적인 자세와 예식을 요구합니다. 오늘 파스카 성삼일로 시작하는 부활 축제를 준비하려고 우리는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회개와 보속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파스카 성삼일 예식의 정점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한 인류 구원의 신비입니다. 주님의 만찬에는 예수님의 형제적 사랑을 보여 주는 두 행위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과 처음으로 당신 몸과 피를 성찬으로 함께 나누신 공동 식사입니다. 두 행위 모두 예수님의 봉사와 사랑과 증여의 표현이며 우리도 이 일을 행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기억하여 두 가지를 모두 행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의 마지막 두 행위에 앞선 오늘 복음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당신의 형제들인 인간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중 목적을 삶의 시작이요 과정이며 마침으로 삼으셨던 예수님의 온 생애를 밝혀 주고 그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이요 주님이시면서도 종과 같은 겸손한 행위를 보여 주십니다. 또한 형제적 사랑을 말로만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직접 보여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가시적인 표지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4월 19일 (금) [(홍) 주님 수난 성금요일]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오랜 전통에 따라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이어지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한다. 본디 이날의 전례는 말씀 전례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들어와 오늘날과 같은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 오늘은 금육과 단식을 함께 지킨다. [복음묵상] 요한 18,1―19,42 성금요일은 전례적으로 주님의 수난이 십자가 죽음으로 절정을 이루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따금 예고하신 예루살렘에서의 비극적인 죽음을 오늘 맞이하십니다. 왜 그런 죽음을 맞이하셔야 했을까요? 고뇌와 고통으로 얼룩진 수난, 폭력적인 죽음은 인간적인 삶의 부정적인 현실을 드러내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예수님께서도 이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수난, 죽음의 가치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인류의 구원이라는 탁월한 목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 진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문과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나무로 엮은 관을 쓰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육체적 수난을 겪으시고, 유다의 배신과 종의 몸값으로 팔리심,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의 도망, 군중의 은혜를 저버린 행동과 종교 지도자들의 증오 같은 도덕적 수난도 겪으셨습니다. 겟세마니에서 겪으신 예수님의 번민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효과적인 서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계획을 받아들이십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이유와 근거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려고, 곧 당신 형제들과 연대하시려고 수난의 십자가를 손수 짊어지십니다. 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는 우리 신앙이 강생부터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온 생애를 설명하고 이해하도록 밝혀 주는 신학적 근거입니다. 십자가의 비밀은 사랑에 있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4월 20일 (토) [(백) 파스카 성야] 파스카 성야의 모든 예식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거룩한 밤을 기념하여 교회 전례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날을 기념한다. 따라서 교회는 장엄한 전례를 통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참된 승리와 해방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한다. [복음묵상] 루카 24,1-12 이 파스카 성야에 교회는 먼저 성경 독서들, 그다음 성체성사를 통하여 풍부한 양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복음은 빈 무덤의 발견 소식을 들려줍니다. "주간 첫날(우리가 '주일'이라 부르는 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무덤에 갔던 여자들은 돌이 치워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 천사로 알고 있는 두 남자가 나타나 그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이 구절을 새겨야 합니다. 바로 부활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때때로 우리도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때 현실적인 삶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과거의 실재들 가운데로 그분을 밀쳐 둡니다. 사도들도 여자들도 "사람의 아들은 ……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고, 살아 계신 분이시며, 우리의 삶 전체가 새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시신을 소생시키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부활로써 인간 존재를 완전히 변화시켜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심오한 신비이고 죽음과 파멸의 모든 세력에 거둔 완전한 승리입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椲潣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