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옥생활 ○
베로니카(Veronica, '진실한 모습'이라는 뜻)가 연옥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눈으로 직접 연옥의 광경을 보고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갇혀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목장의 풍경과
부드러운 햇빛이 내리쬐는 봄볕을 받으며 목욕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 산책을 하거나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앉아
즐겁게 웃으며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평화와 기쁨이 충만된 듯했다.
베로니카는 생각했다.
'나의 하느님! 여기가 도대체 무엇을 깨우치기 위한 장소입니까?
저는 연옥을 거쳐 가는 대신 곧장 천국으로 갔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그때 빛 속의 커다란 형상이 그 여인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 형상이 말했다.
"잘 왔어, 베로니카.
나는 네가 연옥에 머무는 동안 너를 돕고 인도하는 천사인 마이크로넬(Mikronel,
'작은 신'이라는 뜻)이야."
베로니카가 그 형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천사의 아름다운 모습이 시야에 어렴풋이 들어 왔다.
그 여인은 그 천사의 얼굴 생김새나 성(性)이나 나이를 똑똑히 식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직감적으로 마이크로넬에게서
경외심을 갖게 하는 분위기가 풍기는 것은 그의 인품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그 여인은 노을이 지는 석양,
바다와 별들의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인상을 받았다.
"당신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베로니카는 경이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그 천사는 마치 종 소리들과 폭포 소리가 울리는 소리처럼
명쾌하고 투명한 웃음을 쾌활하게 웃었다.
"고마워, 베로니카. 내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야.
이렇게 내가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를 만드신 그분의 은총 때문이지.
그렇지만 실제로 내 이름 마이크로넬이 가리키는 뜻은
아주 훌륭한 근원에 비해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지.
나는 하느님의 최소한의 한 창조물에 불과해.
그건 그렇고 어쨌든간에
나는 너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지금 여기 있는 거야."
그가 말하는 동안 베로니카의 시선은
그들이 있는 곳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에게로 쏠렸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예닐곱 명 정도 있었다.
남녀 모두 각각 그들 옆에는 그들과 동반해 주는 천사가 있었다.
분명하게 휘황찬란한 불기둥이 보였다.
베로니카는 사람들의 몸을 주시했다. 그들의 몸 전체
는 검은 비늘처럼 보이는 것으로 온통 덮여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몸 일부분은 비늘이 덮여 있지 않고,
최고로 순수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눈이 부셔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거기서 뿜어 나왔다.
그때서야 베로니카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자신의 몸은 흉칙한 모양의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 여인은 몸 어디에도 한 줄기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이 비늘을 휘감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뭐지?"
베로니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이크로넬은 천사의 본능적 직감의 힘으로 베로니카가
중얼거린 말을 알아채고는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몸에 있는 비늘에 대해 염려하지 마. 알맞은 때가 되면 떨어져 나갈 거니까.
그 동안에 무엇을 하길 원하지?"
마이크로넬은 베로니카에게 이곳을 둘러보게 하려고 안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 동안 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결코 끝이 없을 것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 속을 살피고 다녔다.
그러는 동안 베로니카는 죽기 전에 알았던 그의 많은 친구들이나
친척들을 우연히 만났다. 만날 때마다 하나같이 다시 만난 것에 대해
행복해하며 따뜻한 말을 주고받았다. 또한 무척 유명한 사람들도 보았다.
그 중 몇몇은 그가 태어나기 전 세기에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이세벨, 네로, 겐기스도 있었고, 칸,
히틀러와 같은 악명 높은 이들도 끼여 있었다.
한번은 베로니카가 연옥에 있는 이러한 인물들에 관해서
마이크로넬에게 자신의 의견를 말했다.
"마이크로넬! 저는 지옥에 떨어져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여기서 만나게 되어 너무 놀랐어요."
그 순간 마이크로넬의 안색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늘 유쾌한 태도로 대해 주었는데,
그 순간은 무척 침통한 표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베로니카를 돌아보고는 가슴이 터질 듯한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 네가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아무런 보상도 바라시지 않는 그분의 순수한 은총 말이야."
그리고 베로니카가 하느님의 판단에 대해 지적하는 말을 했다.
그 여인은 자신의 모습은 전혀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러자 마이크로넬은 단지 빙그레 웃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베로니카는 또한 자기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즐겁게 산책하는 사람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바로 그때
나무 밑에 홀로 앉아 책읽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그 책에 대한 내용을 설명해 주거나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침묵을 지키며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을 읽는 사람은 마치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자주 읽던 책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잠깐씩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일이 여러 번 있을 때마다 뭔가를 받아들이는 듯한 평온함에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요?"
베로니카는 책 읽던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처음으로 물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 회상에 젖어 있어."
마이크로넬은 뜻을 알 수 없는 모호한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곧 덧붙였다.
"네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그 회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줄게."
어찌 되었든 베로니카는
분명히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떤 책도 읽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지 않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안면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특이한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유쾌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시간은 흘러 갔다.
연옥에서는 흥미로운 일들이 아직도 있었지만,
베로니카는 서서히 흥미를 잃어 가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보았던 그 모든 광경들은 몹시 아름다웠지만,
베로니카는 점차 뭔가가 빠졌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번은 그들이 연못에 연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을 때,
베로니카는 자기의 느낌들에 관해서 마이크로넬에게 털어놓았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이 즐겁지 않다는 뜻은 아닌데요,
단지 있어야 할 어떤 것이 빠져 있는 듯해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마이크로넬은 그의 빛을 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가 무언가 빠졌다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셔."
이 말에 베로니카는 자신의 깊은 속마음에서 커다란 빛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베로니카는 감탄에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으면 이 모든 찬란한 광경 속에 하느님의 부재를 깨닫지 못했다니."
그때부터 베로니카는 향수에 젖곤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 아름다운 광경들을 보고 감탄하거나
그와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했지만 그는
자주 한적한 곳에서 명상에 젖어 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마이크로넬은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어도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분위기로 그의 옆에 앉곤 했다.
한번은 베로니카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마이크로넬, 내가 얼마나 여기 있었지요?"
연옥에서는 시간을 잴 수 있는 날이나 해가 없기 때문에 이 질문은
극히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마이크로넬은 대답하기 전에 꽤 머뭇거리다 말했다.
"네가 여기 머물고 있는 이곳에서의 시간은 초로 계산을 하거나
세기로 계산할 수 있든 상관 없는 일이야.
무슨 뜻이냐 하면 이곳은 네가 떠나온 세상과는 같지 않다는 얘기지.
그러나 이것은 알고 있어야 해.
너는 지상에 있는 너의 인간 동료들의 기도 때문에 이제 하느님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야."
베로니카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뇌리 속에 또 다른 의문점이 떠올랐다.
"언제면 내가 하느님을 뵐 수가 있지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이크로넬은
그야말로 뛸 듯이 기뻐하며 즐거운 밝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가 너의 비늘을 다 떨쳐 낸 후에."
"언제쯤이면 다 떨어져 나가지요?"
이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책 하나가 베로니카의 무릎 위에 얹어졌다.
"네가 이 책을 다 읽으면 너의 비늘을 다 떨쳐 내고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을 뵙기 위한 준비가 되는 거야."
베로니카는 그의 설명을 듣고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베로니카는 강한 충격을 받은 듯
눈이 동그래지면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내용은 그의 출생에 관해 기술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책에는 그가 그의 어머니
자궁 속에서 아기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조심조심하며 다루고 있고,
그의 영혼을 진지하고 소박하고 해맑은 모습으로 창조시키려는
하느님의 돌보심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그가 출생하는 상황에 대해
하느님의 깊은 애정이 담긴 섭리에 대한 묘사가 먼저 씌어 있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무척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
그 부분을 읽고 난 베로니카는
경외심에 넘치는 감정으로 자신을 주체하기가 힘이 들었다.
하느님의 그토록 깊은 사랑은 그가 상상했던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감사하는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에 못 이겨
그 부분에서 그만 읽는 것을 멈추었다.
감사하는 마음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해주셨나를 깨달았기 때문이고,
부끄러운 마음은 하느님의 그러한 사랑을 살아 있을 때는 거의 깨닫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마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가 했더니,
어느 새 그의 뺨 위로 눈물이 조용히 흘러 내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 있던 비늘 중에 아주 작은 비늘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강렬한 광선이
흘러 나왔다. 그는 자신의 그런 모습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마이크로넬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그에게 기운을 북돋워 주는 듯이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마이크로넬이 말했다.
"축하해, 베로니카. 너는 이제 이기적인 마음에서 조금 벗어났어."
이제 베로니카는 이해했다.
자신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뭉쳐져 있던 이기심의 단단한 테두리를 고스란히 지닌 채로
연옥에 들어왔던 것을 말이다.
그러나 참사랑이신 하느님은 만약 베로니카가 그분의 사랑을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면, 베로니카 스스로 이기심을 떨쳐,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었다.
늘 베로니카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마이크로넬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가 지금 그분을 뵈었다 하더라도, 너는 그분을 반기지 않을 게야.
오로지 사랑이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게지."
바로 그것이 베로니카가 하느님을 뵐 수 있는 시작인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베로니카는 더 이상 책을 계속 읽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알기까지 그는 조금 지쳐 있어서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잠시 동안 자신의 사회적 삶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자 곧 전보다 강하게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싶은 갈망이 생기며,
그 동안의 삶을 계속 되새겨 보았다.
이윽고 다시 책을 펴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일들이 적혀 있던 쪽을 읽은 후에
낮이고 밤이고 여러 가지방법으로 지켜 주셨던 하느님의 사랑에 가슴이 메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다시 그의 몸에서 비늘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되돌아보면 볼수록
하느님의 자신에 대한 끝도 없는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고,
베로니카는 조금씩 조금씩 자기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향한
순수한 사랑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점차 커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자,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그가 그 책을 읽어 가는 동안에 알게 된
낮선 이들에게조차도 커다란 사랑의 마음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이런 낮선 이들이 그는 형제나 자매들과 같은 소중한 존재로 강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베로니카가 그 책의 마지막 쪽을 읽게 되었을 때
, 마지막 눈물을 흘렸고, 그러자 마지막 비늘이 떨어져 나갔다.
그 자리에서 일어난 그 여인은 마이크로넬처럼 찬란한 빛이 났다.
그는 자신이 돌보던 베로니카의 변한 모습을 보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베로니카가 마이클로넬에게 물었다.
"이제 제가 하느님을 뵐 준비가 된 겁니까?"
"그래 이제 됐어."
마이클로넬이 대답하자 베로니카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디에 가야 하느님을 뵙지요?"
마이크로넬은 애정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면서 잠시 말없이 있었다.
이윽고 마이크로넬이 말했다.
"단지 네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만이 필요해.
천국은 네 마음 안에 있거든.
하느님은 네게 그분을 찾아 주길 기다리시면서 항상 네 마음 안에 계시지."
베로니카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즉시 그는 자신 안에서 하느님이 뜨겁게 포옹해 주시는 것을 느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요한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