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민족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1-20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떤 일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리저리 재 보고 나서,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의 모임에서 누가 사울을 데려오자고 했다면 아마 모두가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르심을 받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사울은 사도 8,1에 등장합니다.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그는 살기를 내뿜는 박해자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 신자들은 쉽게 그를 신뢰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박해자였던 그가 신앙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의심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셨을 때 하나니아스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주님께서 “가거라.” 하시니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사울이 안수를 받을 만하다고 판단해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는 이렇게 선택되었습니다. 사도들도, 하나니아스도,
신자들의 공동체도 그를 선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을 선택하지 않았으니,
그 선택은 분명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선택과 결정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하느님의 개입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개된 일들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깊숙이 관여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는 처음부터 인간의 결정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선택받은 바오로는 회개하여 새사람이 된 다음,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전부이며
그분을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선언합니다(필리 3,8 참조).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현세라는 광야의 여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여정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성체를 주님의 몸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자기희생의 길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그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듯이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도
새롭게 변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