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에 대해 말하는 데에 내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주님이 이 말씀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견하시는 사람들을
파수꾼이라고 일컬으시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파수꾼은 접근해 오는 것을 먼 데서 보기 위해 늘 높은 곳에 서 있습니다.
백성의 파수꾼으로 세워지는 사람도
자기의 열심한 생활로써 높은 데에 서 있으면서 모든 것을 살피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나에게도 정말 마음을 찌르는 말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 내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힙니다.
내 입은 설교의 직분을 제대로 이행치 못하고 또 내 생활은 내 입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행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죄과를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내 게으름과 등한함을 시인합니다.
이렇게 내 죄과를 인정함이 자비로우신 판관 앞에
아마도 내 죄에 대한 용서의 청원이 될지 모릅니다.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내 입에서 쓸데없는 한담을 막을 수 있었고
또 내 마음을 거의 계속적으로 기도의 정신 안에 몰두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어깨에 사목직이라는 짐을 메게 된 후부터는 내마음을 잡아당기는 일들이 많아서
그것을 내 안에다 자주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당과 수도원들에 대한 소송문제를 상의해야하고
때로는 개개인의 생활 및 행위에 대해 생각해야 하며,
세속사에 관여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야만인들의 침범을 우려하여
내 보호에 맡겨진 양떼를 위협하는 늑대의 무리를 두려워할 때도 있습니다.
한편, 법의 통치를 유지시키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주
는 원조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는가 하면
약탈자들의 횡포를 참아내고 온갖 사랑 안에서
그들을 만나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도 숱한 중대한 일들에 산산이 흩어져 갈갈이 찢어진 내 이 정신은
어떻게 내 안에 들어가 완전히 설교의 직분에다 바쳐져
그 직분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지위가 지니는 성격으로 인해 나는 자주 세상 사람들을 접촉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 입을 통제하는 일에 소홀해지기도 합니다.
내 직분에 따른 근엄한 외적 자세를 취한다면 약한 이들은 나를 피해 버리어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그 목표에로 그들을 결코 이끌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나는 자주 그들의 잡담을 인내심있게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약한 자이기 때문에 차차 그잡담에 끌리어 예전에 듣기조차 싫어했던
그런 것들을 즐겁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한때 넘어지기 싫어했던 곳에서 편히 누워 있기를 좋아하는 셈이 됩니다.
열심한 생활이라는 산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아직도 내 약점이라는 골짜기에 누워 있는
비참한이 내 몸은 어떤 종류의 파수꾼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인류의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분께서, 내 비록 부당하다 해도,
거룩한 삶의 정상에 서 있을 은총과 내 입이 효과있게 설교할 능력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그분께 사랑 때문에 그분에 대해 말하는 데에
내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수사가 되는 것으로 만족했으나
그를 필요로 할 때에는 여러 방법으로 교회를 위해 기꺼이 봉사했다.
그는 여러 면에서, 특히 그가 로마 주교가 되도록 부름받았을 때에도 자신의 이익을 희생했다.
그는 일단 공적 일에 부름을 받으면 심혈을 기울여 그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
"인간이 자신의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을 초월 한다는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가진 것을 단념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을 단념하는 것은 많은 것을 요구한다"
(대그레고리오 교황, '복음에 관한 설교',32)바오로수도회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강인한 정신력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 교황 그레고리오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로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습니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서양 정신사의 전환기에 있어서의 성인의 지위와
그인품의 위대함으로 "대교황"이라 칭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암브로시오,예로니모와 함께 최후의 대교부에 속하며,
라틴교부들 중의 마지막인 그레고리오 1세는 중세 교회 문화의 창설자입니다.
성인은 문법,수사학,법률 등을 공부한 후에 황제 유스티누스 2세에 의해
573년 로마시 총독(Praetectus urbis)으로 임명되었으나,
후에 자기 토지를 매각하고 수도자(베네딕도회)가 되어 빈민을 돕고 로마와 시실리등에
7개의 수도회를 건설하였습니다.
로마 교회 7집사의 한사람으로 선임된 후에
교황 펠라지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궁정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어 6년간 봉사했으며,
귀국 후 590년에 수도원장(아빠스)이 되었습니다.
*성 베네딕토아빠스 축일:7월11일,게시판1267번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홈www.osb.or.kr
펠라지오 2세가 죽자 수도자 출신으로는 최초로
50세(590년 9월 3일)에 사제와 로마 시민들이 교황으로 추대했다.
저서로는 "사목규정","욥기 주햬","대화집"외에 854통의 서한집등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겼다.

성인은 교황권을 확립하고,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을 처음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성인은 위대한 로마의 주교이자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설교가였으며,
미사전례를 개혁했으며,교회 성가를 개수하여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교황직의 아버지로 불리면서, 서거 즉시 성인으로 공경받았던 위대한 선구자 였습니다.
590년 9월 3일 교황이 되어 모든일을 운영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고 신앙을 전파하며 그것을 견고히 하는 데 참된 목자임을 보여 주었다.
604년 3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